[제6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수상작/첨삭후기

[제시어] ‘이름’ 
[수상작] 우수

      <그림 속에 빛나는 이모의 전성시대> 구은모 (저널리즘스쿨 2학년)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 쳐준다> 박규희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내가 한때 '폭력배'였던 이유> 박장군 (저널리즘스쿨 1학년)
      <숨길 수 있어도 없앨 수 없는 것> 유정화 (인하대 경제학과 졸업)
      <’촌스러움’에는 조작이 없다> 이정화 (저널리즘스쿨 1학년)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닌> 최지영 (부산대 졸, 저널리즘스쿨 입학예정)

여름방학 초에 열린 제11기 ‘언론인을 꿈꾸는 대학언론인 캠프’ 이후 내게 보내온 칼럼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재학생들이 같은 제시어로 써낸 방학특강 과제 중에서 6편을 골라 시상하고 <단비뉴스> [상상사전]에도 올리겠습니다. 발표와 게재가 늦었는데 1학기 중에 제출한 과제들을 미리 출고하느라 그리 됐음을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이번에 장원을 뽑지 않으면서도 우수작을 6편으로 늘린 것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좋은 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수상자에게는 격려의 뜻으로 작으나마 책 1권씩을 선물하겠습니다. 수상자는 내가 읽히고 싶은 아래 책들 중 읽고 싶은 걸 골라 나에게 메일(hibongsoo@hotmail.com)이나 전화(010-9005-5680)로 연락하십시오. 주소를 알려주면 인터넷서점을 통해 직접 보내겠습니다.

수상작은 첨삭본을 열어보면 잘못된 글쓰기 습관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을 겁니다. 수상작이 아닌 칼럼은 첨삭한 것을 필자에게만 메일로 보냅니다. 여러분 글에 나타나는 공통의 문제들은 과거 피투성이 백일장의 첨삭후기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선물하고 싶은 책]

<대중 유혹의 기술> 오정호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이상헌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 헬렌 토머스
<벼랑에 선 사람들> 단비뉴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진보의 몰락> 크리스 헤지스
<거룩한 코미디> 곽영신
(그밖에 읽고 싶은 책 아무거나)

[첨삭후기]

이번 캠프 칼럼쓰기 제시어는 ‘이름’이었는데, 어렵게 생각한 탓인지 응모작이 많지는 않아 저널리즘스쿨 재학생으로 응모대상을 확대했다. 그러나 보내온 글 중에는 수상작을 늘리고 싶을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이 꽤 있었다.

수상작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글쟁이로서 재능이 엿보이는 글도 있지만 아직은 직업으로서 언론인이 되기에는 상당히 미흡한 글이 다수였다. 프레임이 엉성하거나 군더더기가 너무 많고 문법 오류도 속출해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된 글이 많았다. 수상작 중에도 비슷한 증세들이 나타났으나 발상이 아까워 수상작에 끼워 넣은 글이 있다. 응모자들의 참신한 발상은 앞으로 <단비뉴스>를 보는 걸로 대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름’과 관련한 글감들을 선물하고 싶다.


‘명실상부’한 사회를 위하여

한국 사회에서 이름은 왜곡되거나 오염된 채 쓰이는 때가 너무나 많다. ‘명실상부’란 말은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다’는 건데, 그것이 정반대인 경우도 흔하다. 대량살상을 하고 쿠데타로 집권해서 만든 정당의 이름이 ‘민주정의당’이었고, 그들이 국정지표로 내건 구호가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히틀러의 나치(Nazi)당 정식 명칭도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었으니 이름만으로는 얼마나 친노조에 서민적인가? 유신 때 대통령을 뽑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통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조직이었다. 대의원들은 통일에 대해 주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가 대부분이었을 터이다. 그들 중에는 지방 토호∙유지들이 많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통일∙기득권세력이었다. 현존하는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또한 ‘평화통일’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기관들뿐 아니라 사람들도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이가 넘쳐나는 곳이 한국 사회다. 박근혜 대통령만 하더라도 후보 시절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나 원칙도 신뢰도 저버린 지 오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물의 이름과 본질을 일치시키려 애썼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와 사제가 따로 본명을 지어두되 성년이 될 때까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성년이 되어 이름과 인품이 일치해야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죄인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은 이름을 빼앗고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람세스 3세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자에게 재판관이 붙인 이름은 ‘빛이 증오하는 자’였다. 태양신을 숭배한 이집트인들에게 그보다 더한 저주는 없었으리라. 한마디로 ‘어둠의 자식’이 되고 만 셈이다.

우리도 옛날에는 본이름을 신성하게 여기는 관습이 있었다. 어릴 때는 부르기 좋은 아명을 쓰다가 성인이 되면 본명 대신 ‘자’(字)나 ‘호’(號)를 불렀다. ‘자’는 대개 웃어른이 지어주고, ‘호’는 스스로 또는 남이 지었는데, 처신의 준거가 되거나 스스로 다짐을 하는 뜻의 이름을 선호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이름이 ‘명실상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수없이 등장한다. 이름에는 자연을 벗하면서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지만 마음 속에는 강렬한 권력의지를 감추고 있는 이가 많았다.

예를 들어 국어 교과서의 가사를 통해 익숙한 송강(松江) 정철만 하더라도 워낙 기록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자신의 호와 생애가 딱 부합하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호를 지을 때는 소나무(松) 같은 절개와 강호(江湖), 곧 자연을 좋아하는 심성을 드러내고 싶어했지만, 현실정치에서는 냉혹한 정파주의자였다. 그는 기축옥사를 주도하면서 당색이 다른 동인 1천여명을 처형했다.

물론 정철에 대해 같은 서인이었던 조헌은 ‘곧은 말만 하기 때문에 백관들이 두려워한다’고 평가했지만,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다’고 기록했다. 두 기록이 엇갈려 단정지을 수는 없어도 그가 지은 가사 <관동별곡>에서 그의 속마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는데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도대체 병이 날 정도로 강호를 사랑했으면 강원도 관찰사 발령을 거절해야지 성은이 망극하다니! 노무현 정권 때 청와대 실세가 들려준 말이 생각난다. 고위직 자리 제의를 거절한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고위직에 나간 사람 치고 이름의 명예를 지킨 이는 많지 않았다. 국가정보원과 같은 수많은 기관들 또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짓을 했다가 기관의 명예는 물론 민주주의를 망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정당이든 기관이든 사람이든 이름과 명실상부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사회는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 이름과 실제를 일치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치, 나아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조건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봉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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