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설악산 989고지 26년째 수색 중인 현시천씨

오는 10월 86세 생일을 맞는 현시천(부산시 좌동)씨는 국내 최고령 패러글라이더다. 국내 최대 규모 대회인 춘천국제레저대회 패러글라이딩(낙하산활공)부문의 역대 출전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 19년 동안 총 800여 번 바람에 몸을 실었다는 현씨는 패러글라이딩 쓰시마 대회, 서일본 패러글라이딩 선수권 등 국내외 100여개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요즘도 부산의 영남알프스 패러글라이딩스쿨에서 주말마다 연습하고, 16일 전남 여수 마래산 활공장에서 열리는 국민생활체육회장기 전국패러글라이딩대회에도 출전한다.

▲ 현시천씨가 국방부에서 입수한 설악산 군사지도를 펼쳐 놓고 989고지로 짐작되는 곳을 짚고 있다. ⓒ 박주현

현씨가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한 것은 1996년, 나이 예순일곱 때였다. 한국전쟁 때 희생된 전우의 유해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지난 5월 20일, 부산 현씨의 자택에서 군사지도를 펼쳐 놓고 64년 전의 한 맺힌 ‘설악산 989고지’ 전투현장 얘기부터 시작했다.

아군 전사자 뒤로 하고 퇴각했던 아픈 기억  

현씨는 6.25 전쟁 당시 육군 보병 제11사단 20연대 6중대 본부 소속으로, 이등상사를 도와 전쟁 상황을 기록하고 지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51년 5월, 현씨의 부대는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구곡담계곡 인근에서 인민군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5월 10일, 구곡담계곡 근처 능선 끝자락을 돌아서던 부대원들은 숨어있던 적의 공격을 받았다. 현씨는 5~6미터(m) 앞에 있는 통신병 참호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통신병이 크게 다치는 것을 봤고, 후퇴 지시에 따라 황급히 퇴각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이 때 설악산 전투에 나선 20연대에서 장교, 사병 등 67명이 전사했고 125명이 실종됐다. 현씨는 나중에 북쪽으로 진군하다 정상 부근에서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특히 제주 출신인 현씨의 눈을 유독 붙잡는 장면이 있었다.

“뾰족한 바위 위에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억새밭이 불에 타면서 시신이 반쯤 탔어. 시신을 보니까 배에 하얀 무명천이 감겨 있었어. 일본에는 하얀 배두렁이에 빨간 실로 천 개의 매듭을 지은 ‘센닌바리’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살아남는다는 미신이 있어. 일본군이 제주도에 주둔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군대 나갈 때 동네 처녀들이 전부 센닌바리를 만들어줬단 말이야. (시신들이) 전부 그걸 차고 있더라고. 제주도 사람이구나 했지.”

▲ 센닌바리는 출정하는 군인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기 위해 흰 천에 붉은 실로 바느질을 한 것이다. ⓒ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홈페이지

전쟁이 터진 두 달 후인 1950년 8월, 제주도에는 면마다 훈련소가 임시로 설치돼 병력을 소집했다. 제주시 한경면에 살던 현씨도 한림국민학교에 설치된 제1교육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았다. 그때 21살이었다. 탄약이 없어 제대로 사격 연습도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됐다. 현씨는 당시 고향사람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행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도 너무 애통하다.

“죽마고우인 양사언이라는 친구도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전사통지서만 왔지. 친구의 홀어머니가 나를 볼 때마다 싸움터의 상황을 묻는데 그 참상을 한 마디도 말할 수가 없었어.” 

기억과 달라진 현장에 거듭된 수색 실패 

현씨는 전쟁이 끝난 뒤 군에 남아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운영처장까지 지낸 뒤 1980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부산에서 기원을 운영하다 1989년 전우의 유해를 찾기로 결심하고 당시 전투현장이었던 989고지 답사를 시작했다.

“(설악산) 봉정암에만 가면 989고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 그때 능선에 올라서서 뒤돌아봤을 때 왼편에 법당이 북쪽으로 향해 있었고 내려가는 길목 오른쪽에 독특한 바위가 있었어. 손이 닿을 높이의 큰 바위 위에 한길 높이의 길쭉한 바위가 얹혀 있었고 손으로 밀면 넘어갈 것 같아서 막 밀어보기도 했었지.” 

현씨는 “기억이 생생해 자료 없이도 전투지역을 잘 찾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니었다”고 말했다. 40여 년 만에 찾은 봉정암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억과는 달리 내려가는 길에서 2시 방향으로 법당이 있었고, 남향이었다. 현씨가 봉정암에 기거하는 한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그는 “무슨 꿈을 꾼 것이 아니십니까. 모두 잊어버리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마음을 접을 수 없어 현장을 다시 찾았다. 1992년, 봉정암의 다른 스님과 얘기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의 법당은 최근에 자리를 옮긴 것이며, 원래 법당은 남쪽 능선 기슭에 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원도 인제군 곰골이 지금은 잡초로 묻혀 황폐한 채로 버려져 있지만 전쟁 전에는 5만여 평의 넓은 밭이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곳이 당시 집결지였을 가능성이 높고, 곰골 근처 능선에 전우들의 유해가 묻힌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곰골로 뻗어있는 다섯 개의 능선을 모두 답사하면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중 무너미고개에서 마등령휴게소로 통하는 공룡능선은 길이 좁아 등을 절벽에 붙여야 간신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험준하다. 능선을 다 돈다 해도 유해가 바위에 가려져 있으면 지나칠 수밖에 없다. 이때 현씨의 눈에 띈 것이 패러글라이딩이었다.

“기차를 타려고 (경북 청도군) 청도역 플랫폼에 섰어요. 나지막한 산 뒤로 석양이 지는데 하늘에 뭔가 왔다 갔다 하더라고. 공중에서 바라보면 전투지역을 쉽게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패러글라이딩을 잘 아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내가 나이가 예순일곱인데 할 수 있겠는가 물으니까 ‘걸어 다닐 수만 있으면 됩니다’고 하더라고.”

용기를 내 패러글라이딩을 배우고 비행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전투지역에 가려는 시도는 좌절됐다.

“일단 서풍이나 북서풍이 부는 이륙장이 있어야 하고 착륙장이 있어야 하는데 백담사(인제군 북면) 주변에 착륙할 데가 없더라고. 착륙하지 않고 고도를 높여서 속초까지 갈 수도 있지만 산이 높아 고개를 넘을 수가 없잖아요. 나무가 울창한 곳에 불시착하면 장비가 나무에 걸려 회수하지 못할 판이고.”

모터엔진을 사용하는 패러글라이딩도 여의치 않았다. 동력이 약해서 자유롭게 비행할 수 없었다. 결국 패러글라이딩으로 능선을 탐색하는 것은 포기했다.

10월 마지막 탐사 때는 결실 있었으면

그래도 유해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26년간 989고지를 찾기 위해 16차례 설악산에 올랐다. 현씨는 컴퓨터를 배우고, 전국 각지의 전적지를 답사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후대에 남겨놓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2004년 12월에 블로그를 개설해 전적지 답사기와 백두대간 여행기, 패러글라이딩 경험기 등의 글을 꾸준히 올렸다. 내용이 충실하고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돼 2006년 3월 네이버로부터 ‘오늘의 블로그’ 인증을 받기도 했다.

현씨는 오는 10월 중순 가족과 함께 백담사 산장에서 출발해 곰골로 가는 ‘마지막 수색’을 계획하고 있다. 처음 10여년을 동행해주었던 당시 중대장 복수덕씨가 1998년 암으로 타계한 후 989고지 찾기는 갈수록 어렵고 외로운 작업이 되어온 게 사실이다. 그는 “곰골에서 설악산 대청봉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전우의 유해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며, “이번엔 꼭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989고지를 잊을 수가 없어요. 내 자식이 행방불명되어 어느 산야에 묻혀있을 것을 생각해보세요. 산천을 헤매는 전우의 원혼을 달래 영면하게 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해드리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현씨의 간절한 염원에 정부도 희망을 더해주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2000년 4월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해 올해까지 총 8900여구를 발굴했다. 현씨가 탐사 중인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지구도 대상 사업지로 선정돼 2014년 인제군에서 23위의 유해가 발굴됐다. 국방부는 올해 중 연인원 10만여명의 감식단을 투입해 설악산 상봉과 강원도 철원, 경기도 파주 등 전국 85개 지역에서 유해 수습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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