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정혜윤 CBS PD
주제 ① 책, 그리고 라디오 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시비에스(CBS) 정혜윤 라디오 PD가 내뱉은 첫 마디는 ‘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꿈도 ‘책’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오빠가 <전태일 평전>을 가져왔어요. ‘뭐 이렇게 슬픈 소설이 다 있어?’ 이 말을 들은 오빠가 ‘소설이 아닌 실화’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사람이 분신을 하고, 또 그걸 전 모르고 있었을까요? 언론이 보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때부터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죠.”

대학 4학년 때 본격적으로 언론고시를 공부할 때는 서점에서 살았다. 하나를 알려면 인터넷 검색으로 단번에 알 수 있는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책을 읽고 아는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다 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언론사에 들어가려고 보는 게 아니라 알려고 공부하는 기분이었어요. 내가 너무 몰랐기 때문에 읽기에 몰입하다가 책의 재미를 알게 됐죠.”

PD는 ‘반사층’ 같은 존재

1993년 시험 삼아 본 CBS PD 공채에 덜컥 붙어버렸다. 라디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PD 생활을 시작했다.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말하는 이야기가 제주도까지 어떻게 들리냐’는 질문을 하다 선배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정 PD는 또다시 책을 잡았다. 서점으로 달려가 몇 페이지에 걸쳐 전파방정식을 설명한 책을 읽었다. 그는 “송출하는 전파를 반사하는 ‘반사층’ 의 존재는 그 때 알게 됐다”고 말했다.

▲ PD는 무엇이 방송할 가치가 있는지 선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춰야 한다. ⓒ 송두리

“선배가 그러더군요. 우리는 완벽한 인간이 될 필요가 없다고요. PD 는 반사층, 그러니까 매개자면 된다고요. 잘 반사하기 위해서 잘 듣고 과연 어떤 것이 반사할 가치가 있는지 선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했어요. 입사 1년차에 깨달은 거죠. 방송에 대한 부담감은 그때부터 줄어들었습니다.”

입사 5년차 사춘기, ‘나는 왜 만드는가’

많은 PD가 입사 5년차쯤 되면 우울증에 걸린다.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여러 전문가를 만나 의견을 듣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전문성은 없다고 느끼는 박탈감 때문이다. 정혜윤 PD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사 5년차쯤 되니 열심히 사는 건 분명한데 손에 쥐는 건 하나도 없이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방송의 휘발성을 체감했다.

“그때는 다운로드도 안 되고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방송이 나가는 건 딱 한 번이에요. 일회성. 내가 몇 달을 거쳐 만들어도 한 번이에요. 방송은 휘발되는 거였어요.”

자신의 노력과 정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분이 드는 날이 이어졌다. 고민의 해답은 라디오와 책의 공통점에서 찾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책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독자가 책을 읽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순간 존재 의미가 생긴다. 라디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추억이나 상상을 떠올리는 청취자가 없다면 라디오는 의미 없는 전파에 불과하다. 라디오를 듣고 뭔가를 읽어내고 상상하려 애쓰는 청취자가 존재하는 한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 정혜윤 PD는 라디오와 책, 두 매체 모두 청자와 독자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순간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 김봉기

나는 읽는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만든다

“여러분이 기자나 PD가 되고 싶은 건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뜻일 거예요. 기사를 만들고 싶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근데 만들려면 ‘생각’을 해야 하잖아요. 한번 질문을 던져보세요. ‘나는 생각하는가?’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인정했어요.”

정혜윤 PD가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자신만의 관점을 뜻한다. 무언가를 만들 때 아무런 고민 없이 남들을 따라 하는 게 아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를 담아내는 일련의 사고가 ‘생각’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고 느낄 때는 ‘나는 생각한다, 나는 만든다’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쌓인 게 없어 생각할 수 없다고 느꼈다. 이후 정 PD는 ‘생각’하고 방송을 만들기 위해 책을 읽었다. 새로운 명제가 탄생했다. ‘나는 읽는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만든다.’

그때부터 그는 누구를 인터뷰하든 그 사람이 쓴 책을 모두 읽는다. 10권을 썼으면 10권을 읽는다. 그 사람이 쓴 책을 모두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 반복어휘,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보인다. 그는 누군가의 진심을 듣고자 한다면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 내용은 기억할 필요 없다

정 PD는 뭔가를 만들기 원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독서광’으로 유명한 그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책 내용을 다 기억하세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가장 쉬운 방법은 ‘책대로 살기’다. 체 게바라의 책을 읽었으면 체 게바라처럼 인생을 사는 식이다. 많은 사람이 책을 읽고 나서 책 내용을 기억하려 애쓰지만, 정 PD는 책 읽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 ‘내용 기억하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 정혜윤 PD는 책 내용을 기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책대로 살기'라고 설명한다. ⓒ flickr

“책을 잘 기억하느냐가 책 읽기의 핵심이 아니에요. 책 읽기의 핵심은 판단력을 기르는 거예요. PD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선택하는 데 판단력을 길러주는 게 책 읽기였어요.”

우리는 내일이면 잊힐 뉴스나 가십에 파묻혀 산다. 정 PD는 넘치는 정보 속에서 남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기 생각을 놓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언론인에게 ‘지금 어느 것을 말하고,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지’ 결정하는 판단력이 중요한 이유다. 이를 위해 그는 책 읽기, 책 중에서도 고전문학을 추천했다. 시대별로 구체적인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고전문학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슬픔과 기쁨

“우리사회는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눈이 없는 거예요. 어떤 이야기가 가치 있고, 어떤 이야기가 충분히 말해야 하는 것보다 덜 말해지고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 

▲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사람의 삶을 읽어냈을 때 비로소 이해가능하다. 지난해 4월 출간된 정혜윤 PD의 책 <그의 슬픔과 기쁨> ⓒ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그는 ‘우리사회에 질문이 넘쳐난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실은 질문이 부재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분명 표피에 대한 질문은 넘쳐나지만 기저에 깔린 질문, 곧 본질에 가 닿을 수 있는 질문은 부족하다. 제대로 된 질문의 결여는 표면적 현상만으로 누군가의 행동과 삶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판단하게 만든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그 동안 우리 언론에 쌍용차 문제의 쟁점이나 추이, 견해에 관한 보도는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직접 몸으로 겪어내는 해고노동자 당사자들에 대한 구체적 질문은 부재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당신들은 누구였지요?’, ‘무엇 때문에 5년간 길거리 생활을 버티지요?’, ‘대체 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지요?’ 따위의 질문 말이다.

지난 4월 16일, 정혜윤 PD의 책이 또 한 권 발간됐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날 세상에 나온 <그의 슬픔과 기쁨>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26명을 인터뷰해 적은 르포르타주 에세이다. 책은 쌍용차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들의 삶을 통해 들려준다. 그들이 어디서 나고 자라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들이 어떤 고민의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말한다. 정 PD 는 ‘누군가는 가장 비참한 순간에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고민해서 행동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말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책 한 권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판단기준이 있지만 그것들로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기존의 어떤 판단체계를 들이밀어도 그들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쌍용차 노동자 개인의 슬픔과 기쁨은 그들의 삶을 읽어냈을 때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정혜윤의 방송이 책이 되는 이유

정혜윤 PD 가 생각하는 방송은 주장이나 구호, 슬로건 따위가 아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때문에 불안하다’는 메시지 자체는 방송이 아니다. 대신 A씨, B씨, C씨가 겪고 있는 구체적인 불안이 중요하다. 그에게 수많은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이것들을 엮는 것이 구성이고 그가 생각하는 방송이다.

정 PD에게는 메시지 자체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문학이 그리고 예술이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다. 그는 자신이 읽었던 수많은 책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방식 그대로 청자 혹은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것이다. 읽은 대로 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읽은 대로 방송하고 읽은 대로 살아간다. 그의 방송과 글이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홍세화 정준희 정혜윤 이성규 한홍구 이창식 이주헌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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