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⑨ 청주 박재환 옹기장

부서지고 허물어진 집들, 콘크리트 벽에 휘갈겨진 ‘철거’라는 시뻘건 글자, 용달차로 이삿짐을 옮기는 노부부. 지난 7일 찾아간 충북 청주시 오송읍 봉산리에는 소복이 내린 눈도 채 가리지 못한 재개발의 흔적들이 스산하게 펼쳐져 있었다. 보통 11월부터 3월 사이엔 흙이 얼어 옹기 가마를 가동하지 않는데, 휴지기에 들어간 봉산리 가마에서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12호인 박재환(83) 옹기장을 만났다. 최근 건강식품으로 효소가 각광을 받으면서 효소 담그는 데 쓰이는 옹기의 인기도 치솟고 있지만 박옹의 옹기점은 철거 위기에 놓여 내일을 알 수 없다. 오는 2018년까지 청주시 오송읍 일대 328만평방미터(㎡) 부지에 제2생명과학단지를 만든다는 계획에 따라 충청북도가 재개발을 밀어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 질그릇을 만들고 있는 박재환 옹기장을 연필로 그렸다. ⓒ 유순상

“70년대만 해도 근처에 옹기점이 일곱, 여덟 개 됐지. 여(여기) 앞 흙에는 좁쌀만 한 모래 하나 없고 고운 점토가 많아 여서 만든 옹기가 함흥과 청진까지 팔릴 만큼 유명혔지. 옹기공장은 또 운송이 중요한데 바로 앞 미호천 근처에서 원료를 채취해 지게로 져다 바로 옹기를 구웠던 겨.”

박해 피해 산골에서 옹기를 구웠던 천주교인들 

흰색 작업복을 깨끔하게 차려입은 박옹은 봉산리가 천혜의 자연자원을 토대로 오래 전부터 옹기마을을 형성한 데다, 박해를 피해 숨어든 초기 천주교인의 집단거주지로서 역사문화적 가치도 높아 철거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옹의 6대조인 박예진은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없는 무군무부(無君無父) 사상인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문중에서 퇴출당한 뒤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조선말 천주교인들은 마을과 나라의 박해를 피해 벽지에서 화전(산에 불을 질러 일군 밭)농사나 양잠(누에치기), 옹기점 등을 하며 생계를 이었는데 박옹 집안은 대대손손 옹기점을 하며 신앙을 지켜왔다. 전문가들은 이곳 가마터가 2백 년 전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작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박재환 옹기장. 옹기처럼 둥글고 다부진 모습이다. ⓒ 유순상

“정(丁)자가 두드릴 정인데 그 당시 쌍사람(상놈) 직업 1호가 흙백정이여. 옹기 만들려면 흙을 두드리고 패야 하거든. 그래서 포졸들은 ‘옹기점에는 쌍사람만 있으니 선비들이 발붙일 곳이 아니다’고 생각혀고 여까지 안 왔던 겨. 교인들이 은신하기 제일 좋았지.”

봉산리 옹기점은 주변보다 조금 높은 구릉에 위치해 있다. 제약회사에 다니다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7년전 귀향한 셋째 아들 성일(52)씨는 “하느님이 있는 곳에 가까이 있으려는 종교의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는 1960년 무렵까지 50평 규모의 ‘벌미공소(벌미마을의 작은 성당)’가 있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된 뒤 프랑스 선교사들이 만들었는데, 해방 뒤에는 한국 최초로 주교 서품을 받았던 노기남(1902~1984) 대주교가 한 달에 한 번 성사 예식을 하러 찾아오기도 했다. 

“당시 교인들은 옹기 가마에 십자가나 성모상을 모셔 놓고 가마 안으로 들어가 기도를 혔지. 항아리를 팔러 나갈 때는 항아리 안에 묵주나 성모상을 넣어두고 전도를 혔고. 그래서 (충북) 진천군 베티 성지, 제천시 배론 성지 등 성지 주변에는 옹기점이 많았던 겨. 하지만 교인들이 대부분 처형당혀서 지금 남아있는 곳이 드물어. 그려서 천주교인들은 봉산리 사람들을 피의 순교자가 아닌 ‘백색 순교자’라고 부르지.”

열한 살 심부름꾼에서 일류 도공으로

박 옹이 독 짓는 일에 뛰어든 것은 11살 때다. 아버지 박원규(1908~1942)씨가 일본 탄광으로 강제징용을 갔다 폭약사고로 왼쪽 발목을 잃고 1941년 귀국한 뒤 물레를 밟지 못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서다. 당시 아버지는 재혼한 부인과 장인, 장모까지 모시고 살았던 터라 가족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새어머니는 물동이와 자배기(둥글넓적한 질그릇), 뚝배기 할 것 없이 머리에 겹쳐 이고 시장에 나가 팔았다. 박옹도 두 살 위의 형과 옹기 공장에 들어갔다. 잡일을 돕고 첫 임금을 받아 된장과 간장을 샀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 흙벽돌로 쌓아올린 구식 작업장. 정면 중앙에 있는 항아리가 인분을 담아두는 용도의 '똥장군'이다. ⓒ 유순상

공장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옹기 뚜껑을 만들었고, 15살 때는 그 어렵다는 ‘똥장군’을 척하니 구워냈다. 똥장군은 거름으로 쓸 인분을 모아두는 높이 60센티미터(cm) 정도의 항아리로, 흙을 휘는 까다로운 작업이 많고 제작 과정에서 옹기가 주저앉기 쉬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심부름꾼으로 들어가서 낮에는 어른들허고 일허고 저녁에는 등잔 불 켜 놓고 밤 12시, 새벽 1시까지 연습했던 겨. 주경야독을 한 셈이지. 똥장군을 한 6백 개 만들고 나니까 그때야 제대로 된 걸 만들 수 있겠더라고. 그러니께 한 달에 쌀 두 말 받고 시작한 일이 몇 년 만에 쌀 두 가마니 받고 일 헐 정도가 된 겨.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 일류 기술자가 된 겨.”

박옹은 25살에 같은 마을 출신 김정순(1933~2008)씨와 결혼한 뒤 기술을 더 배우려고 전국 옹기 고수들을 찾아다녔다. 첫 해인 1958년에는 충북 보은군 송평리 옹기공장에 들어가서 가마 온도를 600~700℃로 유지해 옹기가 깨지지 않게 하는 기술을 배웠고, 이듬해부터는 경기도 용인시 삼계리 옹기공장에서 점토를 고르고 풀어 정제하는 법을 3년 동안 배웠다. 경기도 안성시 양협리와 옛 충남 연기군, 인천시 경서동 등 내로라하는 옹기 공장을 다 찾아가 손에서 손으로만 전수되던 비법들을 열심히 익혔다. 

“처음에는 변두리 놈이 겁도 없이 찾아왔다고 무시혔지. 근데 몇 년 안 지나서 내가 저들 선생 노릇을 혔어. 난 이곳저곳에서 배운 게 많았거든. 나중에는 전국에서 제일 컸던 인천 옹기공장 최기영 사장이 날더러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옹기 잘 굽는 도공이라고 혔지 뭐여.”

그렇게 십여 년간 기술을 연마한 뒤 1971년 청주로 돌아왔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쌀 50가마니 값을 치르고 조상들이 일했던 가마터를 인수한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일류 도공들에게 배운 신기술로 가마를 개량해 장독과 술항아리, 쌀항아리 등 손님들이 주문하는 옹기를 뭐든 척척 만들었다. 이웃들은 ‘이제 마을이 부자 될 일만 남았다’며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단꿈은 잠시, 플라스틱과 양은 등 가볍고 질긴 용기들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9년 정부가 ‘옹기에 납 성분이 많다’며 전국 옹기공장들을 단속했다. 흙 자체에 함유된 납이 보통 0.4피피엠(ppm:100만 분의 1g)인데, 정부가 옹기에 쓰는 유약인 광명단의 납 허용치를 0.1ppm으로 규정해 기준을 맞출 수가 없었다. 3년 뒤 인천 옹기공장 최기영 사장과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옹기의 납 허용치를 1ppm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사이 많은 도공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옹기는 투박하고 쓰기가 나쁘거든. 거기다 박정희 대통령도 입산 금지령을 내렸어. 산림 보호를 한다며 옹기 공장이 나무를 연료로 쓸 수 없도록 혔지. 얼마나 힘들었던지 일을 혀도 남는 건 없고 그려서 그 때 4남 1녀 공부시키려고 땅도 대부분 팔아버렸지.”

인고의 세월 거쳐 무형문화재 됐지만 다시 닥친 시련

그저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흐르자 시대는 다시 박옹을 주목했다. 2003년 충청북도가 ‘2백년 역사의 가마터와 옹기 기술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며 그를 충북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으로 선정한 것이다. 또 여러 대학에 도예과가 생기면서 연구자들이 옹기기술을 배우고 기록하러 박옹을 찾아왔고, 2009년에는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무형문화재 작품전에 똥장군 두 점을 출품해 관심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울산 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광고모델로 선정돼 봉산리 가마에서 엑스포 성화의 첫 불을 밝히는 영광도 누렸다. 

“서양에도 옹기가 많겠지만 똥장군의 역사가 그들에게 새롭고 신기한 볼거리였던가 봐. 우리나라는 70%가 산이라 농경지가 산 쪽에 많이 붙어있어. 조상들은 똥장군에다 똥을 담아 지게에 지고 밭에 가서 바가지로 퍼 주었지. 똥이 곡식을 키우는 천연 비료였던 겨.”

흙냄새가 싫다며 떠났던 셋째 아들이 계승자가 되겠다며 돌아오고 시장에서 옹기의 인기도 높아져 살 만하다 싶었는데, 재개발을 해야 하니 봉산리를 떠나라는 지자체의 압력이 닥쳤다. 박옹은 봉산리 가마가 문화재로서 보존돼야 한다며 맞섰다. 시행사인 충북개발공사가 지난 2008년 오송읍 일대의 문화재 지표조사를 추진하면서 이 일대를 누락시키는 등 절차도 잘못됐다고 항의했다. 특히 문화재청이 재조사 요구를 받아들이고서도 지표조사를 미루는 사이 충북개발공사가 지난해 10월 가마터 감정평가를 하겠다며 강제로 옹기점에 들이닥친 일이 있다. 이를 막는 과정에서 박옹과 성일씨가 머리와 목 등에 각각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성일씨는 해당 직원들을 살인미수와 재물손괴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 아파트를 짓기 위해 철거를 진행하고 있는 청주시 오송읍 봉산리의 현재 모습. 대부분의 건물들이 부서지고 박재환 옹기장의 집 등 몇 채만 남아있다. ⓒ 유순상

“시행사가 절단기로 공장 문을 부수고 남자 스무 명과 함께 점령군처럼 쳐들어왔어. 감정평가를 한 뒤 법원에 공탁을 걸면 우리는 빠져나갈 길이 없으니께 그쪽에서 먼저 수를 쓴 겨. 근데 소유자 없이 감정 평가를 하는 건 불법이여. 감정 평가가 나와도 우리는 원인무효화 소송을 할 겨.”

현재 충북개발공사는 문화재청이 공식적으로 봉산리 가마를 문화재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사를 미룰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행법에 따라 감정평가를 하고 철거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성일씨가 낸 고소도 취하하지 않으면 업무방해 혐의로 맞고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옹의 옹기점이 보존되기 위한 관건은 가마가 문화재로 인정받느냐 여부다. 충북개발공사는 지난해 3월 연구용역을 통해 ‘봉산리 칸가마는 축조형태나 재료를 보아 20세기 이전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보통 국내 가마는 안이 합쳐진 통가마인데, 봉산리는 가마 안이 여러 칸으로 나뉜 일본식이어서 2백 년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박옹은 해당 연구원에 옹기전문가가 없고 지적한 부분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반박했다. 

“충북개발공사가 용역을 준 연구원은 옹기전문가도 없이 가마터를 5분 쯤 훑어본 게 조사의 다였어. 엉터리 소견서를 써 낸 거지. 우리 칸가마가 전통이 아니라고 하는데 국내 저명한 옹기전문가의 기록을 보면 일본에서도 고려청자를 만들기 위해 납치한 우리 도공을 시켜 칸가마를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많여. 고려청자는 1400도가 넘어야 유약이 녹는데, 통가마로는 안 돼 칸 가마로 했다는 기록이 많다고.”

▲ 박재환 옹기장이 가마에 땔감을 넣는 모습. 옹기를 굽는 계절에는 전수자인 아들 성일씨와 밤낮 번갈아가며 이렇게 삼사 일 불과 씨름을 해야 한다. (캔버스에 유화로 채색) ⓒ 유순상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와 보전운동을 펼치는 비영리단체 내셔널트러스트도 지난해 1월 봉산리 가마를 보존대상으로 선정했다. 200년 넘게 맥을 이어온 전통 가마로, 규모가 크고 다양한 형태로 보존돼 있어 (한국) 가마의 변천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초창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천주교인들이 교우촌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창조경제가 뭐여.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도 창조 아녀? 저 가마가 보기에는 험상시러워도 불통하고 불구멍하고 다 과학적으로 작용하게끔 맞춰졌어. 저걸 부숴서 다른 데서 만들라고 하는데 나도 똑같이 만드는 법을 몰러. 괜히 워디가서 만들었다가 (옹기가) 금방 깨지기 쉽지.”

비바람 속에서도 뒷마당을 묵묵히 지키던 장독처럼, 채운만큼 비워주는 쌀독처럼 우직하게 살아온 박옹은 봉산리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덧붙였다. 

“내 그릇이 새지 않고 소비자가 좋다고 할 때가 제일 뿌듯허지. 소비자가 인정할 때여. 그런데, (그건) 내가 잘 만들었다기보다는 여(여기) 점토가 좋아서여.”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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