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조한빛 기자

▲ 조한빛 기자
정형외과 의사 김현정의 책 ‘의사는 수술을 받지 않는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프기는 마음이 아픈데, 증세는 팔다리에서 나타난다.” 병을 제대로 고치려면 진짜 아픈 곳이 어딘지 진단부터 정확히 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회 병리를 고치는 일도 마찬가지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올바른 처방이 나올 수 있다. 

많은 여야 정치인들이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고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싫은 소리를 하는 바람에 여당이 일단 꼬리를 내렸지만, 국회의원 90% 이상이 찬성하고, 절반가량이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어 활동 중이니 언제든 개헌 논의는 다시 분출할 것이다. 이들은 ‘합의의 정치’를 위해 헌법상의 권력구조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의회가 대통령의 독단을 견제하지 못하고 야당과 여당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는 게 정말 헌법 때문인가? 

헌법 전체 조문을 뽑아 읽었다. 부칙을 빼면 에이포(A4)용지 13매 정도 분량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헌법에 협치(協治)를 금지한다는 조문은 없다. 국회의원 선거에 관해 이렇게 정해놓고 있을 뿐이다.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비례대표제 기타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제41조 3항) 대통령 선거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통령의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제67조 5항)

승자독식, 즉 선거에서 이긴 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은 현행 선거제도에서 비롯된 문제다. 그렇다면 선거법을 고쳐 승자독식이 완화되도록 만들 일이지, 왜 헌법을 고치자고 하나. 공직선거법 제21조 3항은 “하나의 국회의원 지역선거구에서 선출할 국회의원의 정수는 1인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이런 소선거구제 때문에 집권당이 쉽게 과반을 차지하는 게 문제라면 하나의 선거구에서 여러 의원을 뽑도록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면 된다. 개헌까지 갈 필요가 없고, 선거법을 고치면 되는 일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는 어떤가? 사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인사권, 예산권과 감사권은 물론 법안제안권 등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특히 국무총리와 각 부 장관, 대법원장, 대법관, 감사원장 등을 사실상 대통령이 선택하기 때문에 국가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나다. 하지만 국회가 주요 인사에 대한 청문회와 동의 절차 등 법적으로 주어진 견제권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기는 어렵다. 특히 국회 다수석을 차지한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대신 입법부의 책임과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감히 제왕의 흉내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지 않으려면 의원들이 여야 가리지 않고 협력해 입법부의 임무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의 안색을 살피는 게 아니라 유권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도록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양한 민의가 대표될 수 있도록 선거법을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 영호남 등 특정 지역을 하나의 정당이 독식하는 현상을 막고 소수정파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거나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나누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등을 도입하는 것이 구체적 대안이 될 것이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그동안 변화한 사회상에 맞게 수정 보완할 필요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개헌을 제대로 하려면 각 정파가 각각 딴 생각을 하면서 권력구조 개편 논란만 벌이는 대신, 기본권 신장 등 다양한 필요를 반영한 폭 넓은 토론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정치권 뿐 아니라 시민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널리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추진해야 한다. 대신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증진하기 위한 개혁은 선거법 개정을 통해 빨리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마침 헌법재판소가 선거구 간 인구편차를 3대 1까지 허용한 선거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선거구 조정이 불가피하게 된 이 시점에, 당장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선거제도 개편부터 매듭을 짓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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