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잃어버린 2천년 죽령옛길을 찾아서

임진왜란 때 왜군도 피해간 험한 고개

죽령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풍기읍을 잇는 높고 험한 고개다. 영남 3대 관문인 조령∙추풍령∙죽령 가운데 가장 높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왜적은 평소 죽령 길이 험하여 넘기가 어렵다고 들었기에 그 길을 경유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죽령은 아름답다. 실학자 정약용은 죽령의 아름다움을 시로 지었다.

드높은 소백산에 한 재가 트였는데 (小白岧嶢一嶺開)
당도하여 둘러보니 흥이 일어 도도하네 (到頭飛矚興悠哉)

▲ 소백산역부터 시작하는 3자락길은 죽령옛길을 답사하는 길이지만 조상들이 다니던 옛길은 제대로 복원되지 않았다. ⓒ 소백산자락길 홈페이지

죽령옛길은 풍기쪽에서는 무쇠달마을에서 시작된다. 삼국시대부터 무쇠다리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말로 바꾸면서 수철리(水鐵里)가 됐다. 이 동네는 죽령재 어름에 살던 주민과 화전민 40여 가구가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나 무쇠달마을은 이제 한적한 고을이 아니다. 하늘에서 소음이 들려 쳐다보면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까마득한 고가도로와 한국 최장 터널로 소백산맥을 순식간에 관통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편리함만 추구하는 인간 욕망의 상징이다. 

죽령옛길은 소백산 자락을 감싸고도는 5번국도와 희방사역이 속한 중앙선철도, 그리고 4.6km 죽령터널로 통하는 중앙고속도로에 밀려 과거 영남 3대 관문의 영광을 잃고 아는 이만 찾는 고갯길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조령, 곧 문경새재에만 관광객이 몰린다. 

그러나 고가도로 밑을 지나 조금 걸으면 고속도로의 소음마저 터널 속으로 빨려들고 아기자기한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야트막한 언덕은 온통 사과밭이다. 수확을 앞둔 사과가 가느다란 가지가 안쓰러울 정도로 다닥다닥 매달렸다.

 

▲ 큰 일교차로 당도가 높은 소백산 사과는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한다(왼쪽). 과수원 위로 솟아있는 거대한 중앙고속도로 교각이 풍경을 해친다(오른쪽). ⓒ 김재희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죽령옛길탐사팀’이 찾아간 10월 24일의 죽령은 단풍이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단풍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데도 탐사팀을 빼고는 기이할 정도로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11월 22일 다시 찾은 죽령옛길은 낙엽만 쌓인 채 인적이 더 끊겨 문득 산적이 출몰하던 옛적의 고즈넉함을 느끼게 했다.

죽령에는 대나무가 없다

죽령(竹嶺)에는 알고 보면 대나무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지명이 생겼을까? 죽령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 “죽죽(竹竹)이 죽령을 개척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나무(竹) 고개(嶺)가 아니라 죽죽 장군이 개척한 길이라는 거다.

이곳은 특히 신라와 고구려 접경지로, 오랫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남에서 죽령을 넘으면 남한강 상류 나루터와 만나는 곳이라 한반도 중북부지역 진출에 유리했고, 한편으로 영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입구 노릇을 했기에 이 지역을 뺏기면 다른 곳도 지키기 어려웠다. 고구려 영양왕 1년(590년)에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학자들은 온달이 전사한 곳을 죽령 부근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죽령을 두고 벌인 공방전은 이곳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전쟁과 국경수비를 위한 산성이나 봉수대뿐 아니라 고구려비와 신라적성비 등 자기 영토를 주장하는 관방(關防)유적이 죽령과 소백산맥 일대에 즐비하다.

▲ 답사에 앞서 죽령옛길을 설명하는 윤수경 해설사. 그는 동행 내내 죽령이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 김선기

단양군청 문화해설사 윤수경(65)씨는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북한 8사단과 남한 8사단이 봉우리 하나를 놓고 수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면서 “고개 하나가 고대에서 현대까지 한반도 전쟁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라 설명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죽령이 자주 나온다. 죽령은 군사요충지인 동시에 보부상들의 교역로였고 영남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청운의 길’이기도 했다. 사람 발길이 잦으니 양쪽 산기슭에 자연스레 장이 섰고, 큰 주막 4개가 죽령 곳곳에 있었다. 지금은 가장 작았던 주막터만 남아 있다.

죽령은 오가는 사람들 수만큼 이야기를 갖고 있다. 신라 향가의 하나인 <모죽지랑가>의 배경이고, 상원사 동종의 종유(鐘乳: 종의 젖꼭지)가 묻힌 곳도 죽령이다. ‘다자구 할머니’가 용기와 지혜로 산적을 물리치고, 단양군수였던 퇴계 이황이 충청감사였던 형 온계 이해를 만나 안부를 묻고 형제애를 나눈 곳도 죽령 어딘가에 있다. 

윤 해설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주시와 단양군이 각종 문화재를 두고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인다”고 말했다. 죽령은 두 지역 경계에 자리 잡아 다른 지역보다 보존과 복원 노력이 부족하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지역이기주의 속에 2천년 역사를 간직한 죽령옛길은 점점 잊혀간다.

▲ 죽령주막은 소백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쉼터다. 옹기에는 각종 장들이 담겨있다. ⓒ 김선기

죽령 고갯마루에는 옛 주막을 떠올리게 하는 죽령주막이 홀홀히 서있다. 죽령주막은 주인 안정자(60)씨가 18년째 운영하고 있다. 죽령주막에서는 주인이 직접 담근 된장, 고추장, 술 등을 즐길 수 있고, 풍기인삼을 이용한 동동주, 떡갈비도 별미다.

팻말 하나로 남은 외로운 역사유산

단양쪽 죽령옛길은 주변 풍광은 좋지만 상당한 구간이 시멘트 길로 포장돼 있어 아쉬웠다.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다자구 할머니’ 산신당과 보국사 터가 있어 예전에는 행인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보국사는 축대 모양과 기와 무늬 등으로 미루어 신라말인 9세기쯤 세워진 꽤 큰 절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버렸다. 목 없는 거대 불상 곁에는 무속인이 차려놓은 듯한 조촐한 제사상이 있어 절의 영고성쇠를 말해주는 듯했다.

시멘트길을 벗어난 옛길은 곳곳에서 방치되고 훼손돼 있었다. 옛길은 싸리나무 등속과 억새 등이 자욱해 분간조차 힘들었고 썩어 넘어진 나무들로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옛길을 찾아내기 위해 수없이 이곳을 답사한 윤 해설사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옛길을 더듬어 가는 일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길에는 발길이 끊긴 지 오래였고 묵은 무덤들만이 오랜만에 찾아온 행인을 반기는 듯했다.

▲ 물길 양쪽에 있는 축대의 흔적(원 안)은 과거에 다리가 놓여있었음을 보여준다. ⓒ 김재희

“옛날에 산을 오르내릴 때는 물가를 따라 내려갔어요. 공기가 촉촉해 입이 덜 마르기도 했고, 주변 풍경을 구경하면서 걸어도 길을 잃을 걱정이 없었지요.”

옛 길바닥에 남은 조상들의 발자취

옛길과 물길이 시멘트길과 만나는 지점 근처에 옛 다리 흔적이 있었다. 다리 상판은 없어지고 개울 양쪽에 넓적한 바위가 켜켜이 놓여 있었다. 해설사는 “저건 예전에 다리를 놓았던 자리"라고 일러주었다. 설명을 듣고 맞은편을 보니 마찬가지로 바위가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래 옛길은 골짜기를 따라 나 있었어요. 지금 이 길은 옛날에 다니던 길이 아니라는 거죠.”

윤 해설사가 대강면 용부원리에 있는 죽령 산신을 모시던 서낭당 터와 끊어진 길을 바라보면서 설명했다. 그는 “죽령옛길은 이쪽이 아니다”며 입산금지 안내판이 걸린 줄을 넘어갔다. 비탈길 아래를 가리키며 “물소리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앞장선 길은 온통 작은 나무와 풀로 뒤덮여 있었다.

▲ 윤 해설사가 옛길을 찾아들어가 낙엽을 제거하자 조상들이 수없이 밟고다녀 반질반질해진 바위가 드러난다. ⓒ 김선기

한참을 가던 그가 허리를 구부리고 앉더니 면장갑 낀 손으로 바닥에 깔린 낙엽을 치웠다. 낙엽을 벗겨내자 모습을 드러낸 바위에는 매끄럽게 마모된 흔적이 선명했다. 그는 “옛 사람들이 이곳으로 다닌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마모된 바위 흔적들을 연결하면 예전에 다닌 길을 복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죽령옛길의 깊은 속살을 보려면

2007년부터 만들어진 제주도 올레길은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자원이 됐다. 전국적으로 ‘올레길 따라 하기’ 열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많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제주도와 달리, 다른 지역 도보 여행길은 야심차게 진행되다가 관광자원화는커녕 운영∙보수 문제로 골칫거리가 됐다. 충북 제천시가 운영하는 자드락길도 2012년 1월 총 58km, 7개 구간이 완공됐지만, 예상보다 찾는 발길이 적다.

세계적으로 도보여행이 유명한 곳은 스페인의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불리는데, 제주 올레길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 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처음 걸었다고 전해진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을 순례자(Pilgrim)라고 부르고, 이들을 위한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가 마련되어 순례를 돕는다. 야고보 성인을 상징하는 조개껍데기 표시가 곳곳에 있어 유럽인들이 산티아고 길에 쏟는 종교적 신념이 순례자들에게 전달된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2009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는 박현경(28)씨는 “2000년 전 순례자들이 걷던 길을 따라가 보니 ‘생활 안에 종교가 친구처럼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무신론자인데도 종교를 가진 사람들처럼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 화려하게 물든 단풍 아래 ‘출입금지’ 팻말이 서있다. 왕래가 잦았던 옛길의 명성은 퇴색해버렸다. ⓒ 김재희

<죽령국행제 조사연구>를 펴낸 ‘죽령옛길’ 전문가인 이창식 세명대 교수는 “한국에 산티아고 길을 따라 한 길은 많지만 길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살린 곳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민중의 역사를 담은 죽령옛길을 제대로 복원하면 역사의 자취를 좇는 훌륭한 관광자원도 될 수 있다”며 “죽령의 깊은 속살을 만질 수 있는 문화적 감각부터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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