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니] ‘미적 범주’로 본 ‘미디어 스토리’

대상·객체를 주관·주체가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를 ‘미적 범주’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사람은 독일 미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이다. 국문학자 조동일은 이를 받아들여 스토리텔링 유형을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 4가지 ‘미적 범주’로 체계화시켰다. ‘스토리텔링’은 공기처럼 우리 주위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유비쿼터스적인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에서부터 문학, 영화, 만화,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방송 프로그램 등 모든 것은 스토리텔링의 결과물이다. 예외는 신문기사, 논문, 판결문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스토리텔링을 조동일은 무슨 기준으로, 그리고 왜 4가지로 분류했을까? 이 문제는 앞서 말한 대상·객체를 주관·주체가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 있다. 주체는 ‘스토리’ 속의 주인공이자 화자이고, 객체는 주인공이 바라보는 대상 또는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다. 
 

▲ 조동일, 〈한국문학의 양상과 미적 범주>. ⓒ 조민웅

먼저 숭고미를 보자. 여기서 주체(AS-BE)는 이상화된 객체(TO-BE)와 합일하고자 한다. 우위인 객체에 대해 주체는 조화와 융합을 꾀한다. 다시 말해 ‘있는 것(현실)’과 ‘있어야 할 것(이상)’사이의 투쟁이 없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할 것’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SBS(에스비에스) 창사특집대기획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의 스토리텔링에서 숭고미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히말라야 대자연 속에 사는 브록파 주민은 세상에서 꽃이 가장 순수하다고 믿고, 신이 베풀어 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매일 아침 머리에 꽃을 꽂는다. 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기 마련이다. 브록파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꽃’으로 신에 대한 감사를 표하면서 신과 가까워지길 바라는 것이다. 거룩한 신을 향한 브록파 주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엄숙하고도 경건한 숭고미를 느낀다.
 
▲ 우리는 ‘꽃’으로 신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브록파 사람들을 보며 숭고미를 느낀다. ⓒ SBS 화면 갈무리

우아미는 숭고미와 마찬가지로 이상과 현실의 대립 없이 양자의 조화를 좇는 범주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숭고미처럼 객체를 완벽하게 우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동일한 위치에 놓는다. MBC(문화방송) 설특집 다큐멘터리 <바람의 말>을 보면 우아미를 드러내는 스토리텔링이 나온다. 포르투갈 라고스 마을에 사는 ‘데이비드’는 “말과 함께 하면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애마(愛馬)인 ‘글로리아’와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눈다. 글로리아는 데이비드의 마음을 아는지 어느새 보폭을 맞추며 그의 뒤를 따른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매일 대자연 속에서 글로리아와 함께 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데이비드의 ‘알몸 승마’가 퇴폐적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자연과의 어울림을 추구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에서 우아미가 발현되기 때문이다.
 
▲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 중 하나인 ‘알몸 승마’에서 우아미가 발현된다. ⓒ MBC 화면 갈무리

도표 오른쪽에 위치한 비장미 범주에서 주체와 객체는 심각한 대립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객체에 도전하고 장렬하게 패배한다.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도전하는 주체의 정신에 대해 우리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라고 이름 지었다. 2011년 개봉했던 영화 <모비딕>에서 주인공 ‘이방우’는 사회부 기자로, 서울 근교 발암교에서 발생한 의문의 폭발 사건을 취재하면서 거대하고 음습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발암교 사건’이 대한민국 정부가 조작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감지한 이방우는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취재를 방해하는 ‘정부 위의 정부’ 세력이 등장하지만, 이방우는 세상에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끝까지 맞서고 깨지길 거듭한다. 우리는 이방우가 추구하는 이상의 좌절을 목도하면서 비장미를 느낀다.
 
▲ 주인공 황정민(이방우 역)의 진실 추구가 정부세력에 의해 꺾이는 좌절을 보면서 우리는 비장미를 느낀다. ⓒ 영화 <모비딕> 갈무리

골계미는 4가지 미적 범주 중에서 유일하게 ‘주체’를 우위에 둔다. 갈등을 만들어내는 점은 비장미와 유사하지만, 비장미가 객체를 우위에 두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주체는 객체에게 도전하고 비장하게 패배하는 대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롱하고 풍자한다. 이 조롱과 풍자에는 객체를 우위로 인정하지 않는 주체의 정신이 있다. KBS(한국방송) <개그콘서트>의 “멘갑(멘탈의 갑)”이라는 코너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풍자를 빠뜨리지 않는다. 개그맨 이성훈은 "칭찬합니다. 칭찬 단골손님이시죠. 국회의원님들의 멘탈을 칭찬합니다. 지난 4개월 동안 단 한 개의 법안 처리도 안 하면서 매달 월급을 당당하게 챙겨가는 것도 모자라 이번 추석 때 388만 원의 상여금을 챙겨간 그 강한 멘탈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만날 싸우기만 하다가 이번 체포동의안 부결 때는 똘똘 뭉쳐서 자기 식구 챙기기, 그 강한 멘탈! 더욱 더 칭찬합니다!"라며 국회의원들의 멘탈을 칭찬(?)하는 멘트를 날린다. 이렇듯 골계미는 주체가 현실을 압박하는 객체를 조롱하고 풍자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분출시킨다. 
 
▲ 코미디 프로그램은 ‘골계미’ 스토리텔링이 녹아 있는 대표적 장르다. ⓒ KBS 화면 갈무리

미적 범주는 미디어 콘텐츠의 스토리텔링에서 빠질 수 없는 이론이다. 라디오, TV, 영화, 웹툰 등 다양한 분야의 스토리텔러는 4개로 나뉜 미적 구조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스토리를 창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 프로듀서는 매번 새롭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이야기꾼’으로서 미적 구조 이론을 프로그램 기획 및 구성에 적절히 활용한다. 세세한 구성이나 극적 장치는 논외로 하더라도, 전체적인 아름다움의 형태가 미적 범주 프레임으로 설정된 프로그램은 그 기본이 탄탄해질 수밖에 없다. ‘사분할(四分割)’의 구조가 각각의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러는 ‘AS-BE(현실)’에서 ‘TO-BE(이상)’로 향하는 과정에서 주체와 객체 간의 갈등을 발생시켜 비장미 혹은 골계미를 내뿜을 것이냐, 아니면 객체와의 조화나 융합을 통해 숭고미 내지 비장미를 발현시킬 것이냐를 고민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줄 것인지는 역사적 흐름, 사회 구조 변화, 시대정신(Zeitgeist) 등을 충분히 파악한 후에 결정해야 한다. 현실과 이상은 사람마다 그 거리가 천차만별이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토리텔러라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대립과 융합의 아름다움 중 어떤 것으로 나타낼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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