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재희 기자

▲ 김재희 기자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프랑스혁명을 거친 뒤였다. 5년여 투쟁 끝에 얻어낸 민주주의는 혁명의 이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혁명적 변화를 통해 밀려든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바람은 급격한 사회 발전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 구실을 했다.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 정도의 민의상달 체제는 혁명의 열기 속에 민의를 전면적으로 국정에 반영하는 상설기구인 의회 제도로 발전한다. 의회의 유무는 민주주의가 다른 체제와 구별되는 징표였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갖는 위상은 특수하다. 1948년, 명문화한 법의 필요성을 깨닫고 헌법을 만들어가는 그 시점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체제’로 움직이게 된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렵게 쟁취한 이들과 나면서부터 갖고 있었던 이들은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부터 다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헌법 제1조로 간단히 주어진 것이었기에 쉽게 흔들리는 걸까? 유시민 전 의원의 <후불제 민주주의>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헌법이 담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 조항 하나하나에는 인류의 문명사가 들어 있다. (중략) 제헌헌법 덕분에 우리 국민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략) 대한민국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가장 알맞아 보이고 누구나 원하는 것을 만들었다면 그것에 대한 사용법과 그 의미는 누가 알려줄 것인가? 그런데 만든 사람들조차 연원을 알 수 없다면 그 ‘알맞다’고 느끼고 ‘원했다’고 느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의미를 잘못 사용했을 때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한국에서 서양사상에 근거한 참된 민주주의 개념을 파악하는 일은 힘들다. 처음부터 체제 속에서 의심이나 질문 없이 자라온 탓이기도 하지만 별다른 반성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 공화정’ 아래 살아왔지만 진정한 공화정을 경험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타는 목마름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성취했건만 아직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형식적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의 내용이 다양하기 때문일 터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제도적∙절차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도 시급히 논의돼야 한다. 그 임무는 일차적으로 여당과 야당으로 구성된 국회가 떠맡아야 한다.

청와대 눈치를 보며 세월호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는 게 우리 국회다. 야당의원이 세월호법과 관련해 좀 상스럽긴 하지만 ‘연애’ 운운하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한마디 하자 여당의원들이 보인 반응은 더욱 가관이다. 여당의원들이 맥락을 무시한 채 파르르 떠는 반응을 보이는 건 의회의 본업, 곧 말하기를 포기하자는 것이다. 의회의 발상지인 영국의 의회(Parliament)는 원래 ‘말하는 집’이란 뜻이 아니던가?

여당의원들이 고유임무인 세월호법 등 법 제정에는 뜻이 없고 대통령의 대변인이나 심기경호대 구실만 한다면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밖에 없다. 1950년대 영국 기자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피 흘리고 쟁취한 의회가 아니어서 그 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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