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도시’

▲ 김재희 기자

엄마는 시골에서 소박하게 늙어가는 노후를 꿈꿔왔다. “니들 다 키워놓고 한 60쯤 되면 느이 아빠랑 난 할머니네 집으로 내려갈 거다.” 이 말을 처음 들은 건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이었다. 엄마는 해가 갈수록 친정 나들이가 잦아졌다. 엄마가 주말에 외가에 가면 할머니가 가꾸지 못하는 텃밭을 돌봤다. 김 매고 거름 주고, 자라는 농작물을 대견스레 지켜보곤 했다. 

엄마는 끝내 우리 옥상에 텃밭을 만들었다. 아빠에게 부탁해 옥상 구석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흙을 채워 넣어 텃밭을 두 곳 만들었다. 10년이 지나자 텃밭은 꽤 커졌다. 옥탑 외벽과 면하는 곳에는 몇 송이밖에 안 열리지만 포도나무가 있고, 그 옆에는 파, 고추 같은 작물이 자란다. 또 다른 텃밭에는 상추와 쑥갓이 소복하다. 간단한 채소들은 사먹은 기억이 오래됐다. 엄마가 우리들보다 텃밭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해 서운한 감정이 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엄마가 변했다. 도시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내게 전염시킨 엄마가 “도시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손을 꼭 잡고 “서울에 적응해서 여기 살라”고 했다. 이 발언의 배경은 엄마가 뒤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과 관련 있다. 시골 아낙네처럼 살림만 하고 지내던 엄마였는데……

강남으로 출퇴근하고 나이 어린 아이들과 업적경쟁을 하는 동안 엄마는 예전보다 도시에 대한 이해 폭이 커진 듯했다. 문화생활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아이들의 무한경쟁에 동조했다. 자녀 교육철학도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에서 ‘남들보다 잘 자라다오’로 바뀌었다. 떼를 써야 보내주던 학원도 막내한테는 막 강요를 했다. 엄마는 막내가 뒤처질까 봐 무섭다고 했다.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변신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노후를 준비하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생각해보면, 자녀 셋을 기른 부모님 인생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반영하는 말인 듯싶다. 그런 부모님한테서 나올 수 있는 뼈저린 교훈이었으리라. 마치 노 가수가 데뷔 40주년, 50주년 콘서트 레퍼토리를 짜는 것처럼 당신 인생의 성취와 좌절을 반추하며 자식을 위한 계획을 짜고 또 조언했던 것 같다.

엄마의 실패와 성공담이 모두 담겨있는 내 인생의 마스터플랜에는 자녀, 남편, 집, 직장은 물론이고, 미래와 행복을 포함한 정말 많은 요소들이 유기체처럼 녹아 들어있다. 인과관계도 뚜렷해 하나라도 빠지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엄마의 인생 경험에서 나온 내 인생의 마스터플랜을 듣고 있노라면, 난 이미 그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을까?

데카르트가 했던 것처럼 가만히 앉아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분리하는 일을 해보면, 살면서 내게 필요한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가끔 방을 치우면서도 놀라는 일이다. 언젠가 필요할 거라며 한 켠에 뒀던 물건들은 내가 본래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에 대한 존재를 망각하게 만드는 수준까지 이른다. 

도시는 잡동사니로 가득한 거대 공간이다. 아플 때 대비해 병원이 있어야 하고, 아이가 뒤처질 때 대비해 학원이 있어야 하고, 아이가 심심해 할 때 대비해 TV와 놀이터가 있어야 한다. 보이면 이용하게 되는 게 인간의 습성이다. 불필요한 것은 곁에 널려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찾아도 없다.

도시는 그런 것이다. 기술 또한 그런 게 아닐까? 편리가 주는 함정이 여기에 있다. 한 순간을 위해 우리는 보관하고 유지한다. 순간의 쓸모를 위해 너무나 긴 시간을 기다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병원과 기관들이 보여주는 광고들은 불필요한 생명연장과 기우를 심어준다. 끊임없이 병원을 드나들며 검사받고 진찰받고 신경 쓴다.

병원이 생성하는 불안은 우리에게 없던 병도 만들어준다. ‘건강염려증’이라는 병까지 있다. 우습게도 내 주변사람들이 병원에서 자주 듣는 말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신경성인 듯싶다”는 것이다. 신경성 우울증, 신경성 위염, 신경성 두통, 신경성…… 다양한 병리현상은 ‘신경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다.  의사에게는 무능을 감추는 좋은 변명이다.

당장 내가 견고한 체제에서 벗어날 용기는 없다. 하지만 희망적인 건 도시와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살아있다는 점이다. 순응하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를 잘 아는 엄마는 이런 나를 꾸짖는다. 도태되지 말라는 거다. 하지만 도태의 공포가 진정한 ‘나’에게 도태를 막는 수단이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탈도시가 도태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이 만들어 낸 수단과 도구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신경성’의 병리를 벗어나 건강하고 더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길이 되리라 나는 믿는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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