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분노’

▲ 박소연 기자
‘분노하라.’ 전직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은 그의 책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스테판 에셀에게 분노란 나치즘에 맞서 싸우게 한 원동력이자 그를 영원히 투사로 살게 한 이유였다. 젊은이들이 분노하기를, 분노함으로써 멈추지 말고 진보하기를 늙은 투사는 바랐다.

분노는 진보를 움직이는 힘이다. 현실에 대한 분노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진보의 이상을 만든다. 분노 없이는 이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분노한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지키는 사회’를 꿈 꾼 것과 같다. 만약 전태일이 당시 노동환경에 만족하고 분노하지 않았다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스테판 에셀이 분노를 강조한 이유지만 동시에 진보가 항상 패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은 생활의 만족을 근간으로 한다. 그 때문에 대중은 분노하기보다는 만족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진보는 자꾸 만족을 헤집고 분노를 끄집어내려 한다. 분노해야 할 일을 제시하고 분노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는 진보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만족을 원하는 대중에게는 그렇지 않다.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만족하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만족하고 싶기 때문에 분노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런 대중에게 진보는 트로이의 평화를 깨는 예언가 카산드라처럼 불청객 같은 존재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카산드라는 진실을 예견하는 예언가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녀는 트로이 전쟁을 예견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녀의 예언이 진실인지 아닌지 여부와 관계없이 평온한 트로이의 일상을 깨는 그녀의 불길한 예언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청객이 되는 것이 카산드라의 숙명이었던 것처럼 패배하는 것은 진보에게 당연한 일이다. 다만 한 번의 승리가 성공을 의미하지 않듯이 패배가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멈추지 말고 분노함으로써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진보의 역할이자 행동방식이다. 승리를 위해 대중의 입맛에 맞게 분노를 버리고 만족을 택한다면 그건 진보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할 것’과 함께 ‘멈추지 말 것’을 강조한 이유다. 역사적으로 진보는 여러 번 패했을지라도 분노하고 있는 한 결코 실패한 게 아니다. 눈 앞에 보이는 ‘일승일패’에 ‘일희일비’하는 대신 멈추지 말고 분노하는 게 진보의 몫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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