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밥'

▲ 김연지 기자

얼마 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신기한 공통점을 찾아냈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와 밖에서 밥을 먹을 때면 늘 술잔도 함께 기울인다는 점이다. 처음 만난 어색한 사람은 물론이고 친한 친구나 가족하고도 마찬가지다. 친구들과 나는 밥만 먹고 헤어지면 속 깊은 대화를 미처 다 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을 느낀다는 데 공감했다. 예전에는 밥 한 끼만 같이 먹어도 친해진 것 같은 유대감을 느꼈는데, 어느 순간 밥만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한 거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하는 말도 “밥 사줘”가 아닌 “술 사줘”가 되었다.

밥의 위상이 술에 치이게 된 것은 ‘집밥’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시인 이문재는 집과 밥의 분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전에 밥이란 당연히 집에서 먹는 것이었지만, 혼자 사는 수많은 현대인에게는 ‘집밥’보다 ‘밥집’이 더 익숙하다. ‘집밥’이라는 신조어의 탄생은 역설적으로 ‘집밥’이 사라진 현실을 증명한다. 

2010년 서울의 1인 가구는 85만이었다. 1980년과 견주면 10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러니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편의점의 식품 판매량이 급증해 유통업계 판도가 바뀌고 있고,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위한 전용식당도 생겼다.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밥상보다 독상에 익숙해졌다. 많은 이들에게 ‘밥 시간’은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서 단지 끼니를 때우는 시간으로 전락했다. 시대가 변하고 가족의 형태와 생활방식이 변했으니 과거의 ‘밥 시간’과 지금의 ‘밥 시간’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의 ‘밥 시간’을 잃어버린 현대인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것이 ‘술 시간’일 테다. 

그러나 취기를 이용해 대화를 트는 ‘술 시간’은 근본적으로 ‘밥 시간’과는 다르다. 어려웠던 시절, 한 끼 한 끼가 소중했던 과거에 ‘밥 시간’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시간이었고, 구성원 모두가 빠짐없이 모여 앉아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밥 시간’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 시간이자, 그 일상을 유지해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반면에 ‘술 시간’은 휘발성이 있다. 독일 시인 로가우는 “술이 빚어낸 우정은 술과 같아 하룻밤밖에 지속되지 못한다”고 했다. 술이 만들어주는 유대감은 일상에 깊이 머물지 못한다.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법화경의 구절처럼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얼마 전, SNS에서 ‘겸상 프로젝트’라는 재미있는 포스터를 보았다. 매 끼니를 혼자 때우는 현대인을 위한 프로젝트라는 설명과 함께, 원한다면 누구든 와서 함께 밥을 먹으며 공감하는 시간을 갖자고 씌어있었다. 문득 ‘밥터디’를 한다는 고시생 친구가 생각났다. ‘밥터디’는 밥과 스터디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다. 혼자 고독하게 공부하는 외로운 고시생들이 모여 밥이라도 같이 먹자는 ‘밥터디’는 짠하면서도 뭉클하다. 여전히 밥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하고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증거 같기도 하다. 

가족과 함께, 혹은 친구와 함께 둘러앉아 따뜻하고 정갈한 ‘집 밥’을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술 없이 밥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유대감을 느껴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밥만 먹고 헤어지더라도 충분히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었으면…… 다음에 친구를 만나면 ‘밥만 먹고 헤어지기’를 제안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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