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장경혜 기자

▲ 장경혜 기자

홍상수와 김기덕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영화감독이 됐다.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만큼이나 다른 영화를 만든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은 늘 지식인이다. 대부분 영화감독이거나 영화과교수, 대학생이다. 이들은 두 손으로 실제가 아닌 이론을 만진다. 세상에 대한 저마다의 이해를 과시하기 좋아하며 '개똥철학'을 자랑하는 인텔리 계층이다. 홍상수는 영화에서 허풍 가득한 말과 술자리 장면을 지겹도록 반복하고 변주한다. 수없는 말들이 쏟아지지만 보통 여자와 한번 자보려는 마음에서 나올 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어느 순간부터 김기덕 영화는 대사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무언영화'를 만드는 셈이다. 대신 행위에 집중한다. 계급도 홍상수 영화의 등장인물과 다르다. 주인공은 대부분 하층민이다. 도시빈민에서 폭도, 범죄자, 기지촌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끝없이 노동을 한다. 지식인이 떠드는 현란하고 심오한 지식 따위는 이들 세계에서 소용이 없다. 

주인공이 시종일관 침묵하는 이유는 애초에 제 언어를 갖지 못해서다. 이들의 말은 충분히 교육받지 못해 미숙하거나, 혹은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일쑤다. 자연스럽게 초점은 '행위'로 향한다. 언어를 갖지 못했기에 '과잉 행동'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사람들. 욕망을 말하기 위해 성기를 잘랐다가 붙이고 복수를 말하기 위해 상처 준 자의 눈앞에서 죽어버리는 이들.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관객은 육화(肉化)한 언어, 이를테면 비명과 절규를 들어야 한다. 세상에서 이들의 존재는 기억에서 사라진 유령이나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기이한 행동을 해서라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기 의사를 드러내는 사람들은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할머니들은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흙바닥에 눕는다.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지역의 토지와 토착민의 생계는 대도시의 원활한 에너지 공급을 위해 희생된다. '전원개발촉진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다. 분당에선 유명가수를 초청해 송전로 지중화 건설 성공을 자축하는 콘서트를 벌였지만 밀양의 촌로들은 목줄을 매만지고 '음독자살'을 시도하며 절망의 깊이를 가늠한다.

'과잉 행동'은 정당한 절차를 밟지 못해 곪아터진 갈등의 실체를 폭로하는 수단이었다. 정부가 정보를 독점한 사회에서 지역사회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없었고, 토론과 합의절차에서 정작 지역민의 이야기는 빼버렸다. 실제 피해가 시작됐지만 구사할 수 있는 세련된 언어는 없다. 그래서 행동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다. 눈살을 찌푸릴 망정 행동만이 언론에 한 줄이라도 실린다. 비극의 주인공이 돼야 겨우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사람들. 소수만이 민주주의를 독점할 때 ‘국민 행복 시대’는 오지 않는다.

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동양증권이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보았듯이 채권을 샀다가 피해를 본 이들의 99%가 개미투자자다. 직원들은 법정관리를 신청하던 당일까지 부실채권을 팔았다. 위험부담에 대한 고지는 없었고 고금리 수익을 보장한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채권을 산 이들은 대부분 경제지식이 별로 없는 서민들이다. 자식 결혼자금을 위해, 등록금을 위해, 부모님 노후를 위해 푼돈을 아껴가며 목돈을 일궈나가던 이들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금감원 앞에 몰려가 ‘내 돈 달라’ 소리치며 원통하게 우는 것뿐이다. 잘못은 판매 직원에게 돌아가지만, 말단 직원도 거대금융기관의 희생양이다. 이들 역시 ‘법정관리는 절대 없다’는 기업주 말을 믿으라는 지시에 따라 할당된 채권을 팔았을 뿐이다. 동양증권 여직원 한 명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했지만 그 역시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이였다.

밀양 주민은 어느새 ‘비정상인’으로 몰리고 있다. 정부의 눈에 그들은 정당한 공권력 행사를 트집 잡는 폭도나 떼쟁이다. 동양증권 영업사원은 ‘사기꾼’이 됐다. 서민을 상대로 불완전판매를 자행한 이기적인 세일즈맨이 됐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한국 사회의 ‘가짜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선 수많은 말이 국민을, 특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쓰인다. 국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울타리인 까닭이다. 우리 사회는 ‘가짜 민주주의’가 횡행하고 있다.'가짜 민주주의'에는 제도 내에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통로가 없고, 공권력이 강압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관철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현재현 회장처럼 서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도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는 민주주의다. 겉으로 타협을 내세우지만 공권력이 강압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관철할 수 있는 민주주의다. 정보도 없고, 지식도 없고, 그렇다고 제도 내에서 개진한 의사가 받아들여지는 통로도 없다. 그러니 누군가는 농약병을 매만지고 알몸을 드러낸다. 상처받은 짐승이 신음소리로 제 상처를 알리듯.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 행복, 사랑' 같은 가치를 포용하기 힘든 제도인지도 모른다. 아니 민주주의 자체가 점차 알맹이 없는 ‘말잔치’로 바뀌어가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걸 위해 투쟁하고 피를 흘리고 있는 건 아닐까?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는 그 내용이 달랐다.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가 그 격차를 말해준다. 한국 사회는 제도로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것을 죽이려 한 기간이 더 길었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중의 서툰 말과 의견이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된다. 제도권이 그들을 이끄는 게 아니라 그들이 민주주의의 주체로 나서서 제도권을 이끈다. 힘이 있든 없든 모든 죄는 엄벌되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통치가 가능하다. 그 과정의 ‘갈등’과 ‘불화’는 가치 실현을 위해 지불되는 당연한 사회적 비용이다. 우리 사회는 건강한 민주주의가 포함하는 ‘갈등’ 자체를 없애기 위해 말과 지식을 빼앗았다. 오늘도 누군가 반향 없는 비명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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