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조수진 기자

▲ 조수진 기자
“이번에는 권씨를 뽑아줘야겠어. 마을 사람들 동네 온천 이용료를 절반으로 깎아주겠다고 하네. 그리고 박씨는 작년에 한 일이 없잖아.”

얼마 전 고향집에 들렀을 때 아버지는 이른 아침 동네 주민들을 만나고 들어오며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곧 실시될 이장 선거에서는 지난해 선거공약을 지키지 않았던 박씨보다 권씨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렇게 이장 후보자들에 대해 인물과 공약을 따지던 아버지가 올 6월 지방선거에 대해서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새누리당 후보에게 표를 줄 것이라고 일찌감치 선언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경북의 내 고향마을에서는 새누리당이라는 배경이 후보자의 공약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를 약속했다. ⓒ 새누리당 공식 홈페이지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걸었던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를 새누리당이 번복했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지방선거의 독립성 확보’를 내세우며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지난달 23일 정당공천제 유지를 발표하며 “이것은 공약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공약을 개선하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일대 전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공천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국민의 뜻에 맞는 후보를 찾아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공천개혁의 진정한 방향”이라고 덧붙였다. 정당이 나서서 지역을 대표할 만한 인재를 잘 찾아내면 지역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과연 황 대표의 말대로 정당공천제 유지가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이어질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미국 철학자 폴 우드러프의 <최초의 민주주의> 표지.
미국 철학자 폴 우드러프는 <최초의 민주주의>에서 투표, 다수결의 원칙, 그리고 대표선출과정에 정당이 개입하면 민주주의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초자치 선거에서 정당이 후보자를 공천하는 경우 우드러프가 지적한 문제들이 그대로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정당은 자신들의 정치게임에 쓸 ‘칩’으로 후보자를 골라 내보내기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들은 지역구 살림에 적합한 후보자를 투표 대상으로 맞이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둘째, 정당공천제는 그 지역에서 다수 지지를 받는 정당 후보가 손쉽게 당선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해당 후보는 유권자의 목소리를 적극 들으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민의’가 지역정치에 반영될 가능성이 낮아진다. 이처럼 다수결로 결정되는 지방선거에 정당이 관여한다면 지역 주민은 권리의 일부분을 정당에게 내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당공천으로 당선된 대표는 자신을 뽑아준 지역 주민들보다 공천해준 정당의 이익을 대변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 공천에서 또 ‘낙점’을 받으려면 당에 대한 충성심을 확실히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영남, 호남 등 전통적으로 특정정당의 영향력이 큰 지역일수록 선거 결과가 정당에 좌우되므로 후보자들은 당의 눈치를 더 많이 볼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이 주장한 대로 정당공천제는 ‘후보가 난립하는 무공천 선거’에 비해 유권자의 고민을 단순화시켜 선거참여율을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투표하는 사람 수가 좀 늘어난다고 해서 과연 그 결과가 옳은 선택이 될 것인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무엇보다 민초, 즉 풀뿌리 시민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할 기초자치기관의 대표를 뽑는 일에 정당이 개입하면 선거의 쟁점이 인물이나 지역공약 대신 정당 중심으로 바뀐다. 지역 주민들은 후보자들의 됨됨이나 공약의 유용성을 따지는 대신 기억하기 쉬운 기호와 색깔 유세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의 공약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지방자치에 대한 실질적 참여가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진전에 장애가 되는 일이다.

반대로 정당공천제가 폐지되면 후보자들은 정당의 환심을 사려 애쓰는 대신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기초로 선거공약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러한 후보자들의 경쟁은 거대 정당들이 지방선거에서 의석 수 확보 경쟁을 할 때보다 더욱 실질적인 유권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것이다. 지방 선거에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곧 지방자치가 더욱 민주화됨을 뜻한다. 정당공천제가 폐지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투표대상을 정했던 아버지도 지역에 정말 도움이 될 대표를 뽑기 위해 후보자들의 면면을 진지하게 살펴볼 것이다.

민주주의 및 선거지원을 위한 국제기구(IIDEA) 홈페이지에는 각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질문들이 제시돼 있다. 여기에는 정당공천제와 관련된 항목들도 있다. “시민들이 유권자 등록과 투표 과정에서 얼마나 용이한 접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정당이나 정부의 영향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인가.” “선거 후보자 등록 절차가 공정하며 정당과 관계없이 모든 후보자들에게 유권자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언론접근 등)이 공정하게 주어지는가.” “유권자인 사회구성원들의 의견이 제대로 입법에 반영되고 있는가.”

기초자치 선거에 정당공천제를 유지하는 경우 우리는 이런 항목에서 결코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진정한 지방자치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정당공천제는 약속대로 폐지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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