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문화체험] ① 선비들은 무엇으로 살았을까

안동이 보존문화를 꽃피운 까닭

안동은 동방유교의 본향으로 알려졌지만 불교와 민속 등 다른 전통문화 또한 제일 잘 보존해온 곳이다.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과 벽돌탑인 봉정사 극락전과 법흥동 7층전탑이 둘 다 안동에 있다. 가장 오래된 강원도 상원사 동종도 실은 안동에 있던 것을 예종이 세조의 명복을 비는 원찰인 상원사로 옮긴 것이다.

양반의 고장이라지만 백정과 같은 천민이 양반을 풍자하는 하회탈춤이 5백년간 전승된 곳이 안동이고, 무당이 성주풀이를 할 때 불러 모시는 성주의 본향이 안동 땅 제비원이다. 차전과 놋다리밟기 등 민속놀이가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1940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안동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됐다.

시군 통폐합 이전인 1992년 통계로 국보와 보물 등을 포함해 국가 또는 시도가 지정한 문화재는 안동군이 178점으로 가장 많고 경주시가 173점으로 그 다음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도대체 이런 경이로운 보존문화가 어떻게 안동에서 유독 융성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지역∙농업보도실습] 수강생들이 안동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한국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이다. 국학진흥원과 부속 유교문화박물관을 이곳에 세운 이유 중 하나가 안동의 서원과 종가들이 보존해오던 목판과 고서의 멸실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 <퇴계처럼>의 저자인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이 퇴계의 생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이대용

안동은 각종 문화유산이 풍부한데다 골골이 들어선 47개 종갓집과 37개 서원이 저마다 문화재 보존센터 구실을 해왔다. 문벌과 전통을 중시하는 안동 사람 특유의 전근대적 사고방식 또한 문화유산 보존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제 안동의 반촌들도 젊은이들이 떠나고 마을이 쇠락하면서 가문들이 개별적으로 희귀자료를 보존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그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쥐가 쏠거나 좀벌레가 먹고 도둑 맞거나 화재로 잃어버린 고서와 목판이 허다했다.

36만점 ‘민간보물’이 모인 곳

2006년 개관한 유교문화박물관은 독특한 방식으로 문화재 보존에 기여한다. 지금까지 고서 11만여 책, 고문서 18만여 점, 목판 6만여 점 등 총 36만여 점을 수집했는데, 대부분 소유권은 문중에 남겨두고 보관만 해주는 방식이다. 이 방대한 자료는 규장각도서나 실록처럼 왕실이나 조정이 아니라 주로 민간에서 생산하거나 관리해온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국내 유일의 유교문화박물관은 10개 전시실을 두고 있는데, 각 가문이나 서원에서 기탁받은 자료들 가운데 문화재 가치가 높은 것들을 엄선해 전시한다.

현판전시관은 안동의 정신문화를 압축적으로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현판은 건물로 들어가는 문 상단이나 처마 하단에 달아 그 건축물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전시관에는 진흥원이 보관하고 있는 800여 현판 중 50장을 전시하고 있다. 도산서원 현판도 도산서원이 아니라 이곳에 있다. 김순석 수석연구위원은 “훼손을 우려해 원본은 이곳에 보관하고 도산서원에는 복각한 것을 걸어두었다”고 설명했다.

▲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현판도 진품은 도산서원이 아니라 유교문화박물관에 있다. ⓒ 이대용

도산서원 글씨는 한석봉이 썼습니다. 퇴계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5년 뒤 제자들이 도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키는데 선조 임금이 한석봉을 불러 글씨를 쓰게 했습니다. 왼쪽 맨 끝 글자인 ‘원(院)’자를 쓰게 하고, 서(書), 산(山), 도(陶) 순서로 쓰게 했죠. 한석봉은 그제서야 퇴계를 모신 서원의 현판을 자신이 쓰게 된 것을 알고 놀랍니다. 이 때문에 현판의 좌우방이 기울었고 ‘도(陶)’ 자의 갈고리(阝)가 떨렸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유교박물관 2~4층 전시실은 <소학>(小學)과 <대학>(大學) 등에 나오는 유교이론을 바탕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 후기 화가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는 실경산수화다. 훼손되기 전 4대강의 본모습을 사진이 보여주듯 안동댐으로 수몰된 지역이 그림으로 남아있다. 현재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에서 시사단(試士壇)을 볼 수 있는데 그림에는 비어있다. 시사단은 그림이 그려진 이후 세워졌기 때문이다. 시사단은 노론이 집권하면서 벼슬길에서 멀어졌던 영남 남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치른 도산별과를 기념하는 비각이다.

박물관 한쪽에는 한국유학의 학맥도가 전시돼있다. 그림에는 실학자 이름도 나눠져 있는데, 성리학과 실학이 실천방향은 다르지만 한국유학의 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로 퇴계∙남명학파를 영남학파, 화담∙율곡∙우계학파를 기호학파라 부른다.

남녀평등의 가족제도

조선시대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가족제도에서 가족이 많으면 재산 분배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의 유언장처럼 재산을 분배하는 문서인 분재기를 남겨 상속 순위와 몫을 정했다. 분재기는 부모가 죽기 전 직접 재산을 분배한 분깃문서와 부모가 죽은 뒤 형제들이 모여 합의로 재산을 분배한 화회문기(和會文記)로 나뉜다.

박물관에 전시된 권심처손씨분깃문기는 권심의 처 손씨가 자식 4남매와 장손 그리고 첩의 딸에게 노비를 나눠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4남매에게 비슷한 수의 노비를 나눠주는 등 조선 전기까지는 남녀 균분상속이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안도형제화회문기는 퇴계의 손자 5명이 재산을 나눠가진 것으로 조선 전기와 달리 장자인 이안도가 가장 많은 상속을 받은 것이 특징이다. 이때부터 아들, 특히 장자가 중요해지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장자 상속분이 커진다.

▲ 임계계회지도의 상단에 전서체로 계회 명칭을 적었고 바로 아래에 산수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배치했다. ⓒ 유교문화박물관

임계계회지도(壬癸契會之圖)는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임자(壬子, 1552년)와 계축(癸丑, 1553년)에 태어난 이들이 모은 계인데 요즘 모임에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듯 당시에도 모임 풍경을 그리고 참석자의 이름∙출신∙직책 등을 남겼다. 가운데는 시 8편이 적혀있는데 선비답게 그날 모여서 시문을 주고받은 뒤 등수를 매겨 기록했다. 이런 계모임을 하면 회원수대로 문서를 만들어 나눠갖는다. 글씨와 시문에 그림까지 있어 당대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세 칸짜리 집에서 우주를 성찰하다

▲ 안동의 문중대표 등이 퇴계 선생에게 뭔가를 아뢰는 '고유' 행사를 하기 위해 도산서원 전교당에 모여있다. ⓒ 이대용

낙동강을 따라 언덕길을 돌아가니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이었다. 서원 앞 마당에 우물인 열정(洌井)이 있는데 퇴계는 우물조차도 교훈으로 삼았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물은 길어도 줄지 않으며 안 길어도 넘치지 않는 것이다. 우물은 주인이 없어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가 마시는 것이다.

도산서원은 원래 퇴계 선생이 4년에 걸쳐 지은 세 칸짜리 서당이었는데 거목이 된 매화나무들이 정취를 더한다. 매화는 사군자 중 첫 번째로 꼽히며 많은 선비들 사랑을 받았지만 퇴계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 퇴계의 마지막 말이 "저 매화나무 물 줘라"였다고 한다.

▲ 부엌ㆍ방ㆍ마루 밖에 없는 세 칸짜리 도산서당. 가운데 작은 방문 열린 곳이 퇴계가 기거하던 방이다. ⓒ 이대용

그러나 지금의 도산서원에는 너무나 많은 건물이 들어서 퇴계의 삶을 고스란히 느끼는 데는 오히려 방해되는 면도 있다. 소박한 삶을 실천하고 좁은 방에서 우주의 이치를 성찰한 퇴계 선생이 지금의 도산서원을 본다면 무어라 말할지 궁금하다.

숨겨놓고 보고 싶은 청량산

내장산 단풍은 첫 눈에 반하지만 쉽게 질리고, 청량산 단풍은 두고두고 보며 반하는 멋이 있지요.

▲ 청량사 주지 지현스님이 청량사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 이대용

안동문화권인 봉화 청량사 주지 지현스님이 녹차잔을 건네며 한 말이다. 단풍철이 되면 내장산은 산 전체가 시뻘겋게 물드는 반면, 청량산은 12개 바위 봉우리 주변이 은은하게 물들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다. 퇴계는 어릴 적부터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 선생이 지은 ‘청량산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산을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 청량사가 있는 청량산은 퇴계가 즐겨 찾던 곳이다. ⓒ 이대용

복숭아꽃과 어부가 등장하는 것은 퇴계 선생이 청량산을 도연명의 무릉도원으로 여겼기 때문일 터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 역시 청량산을 ‘경북답사의 클라이맥스’라 하면서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답사기를 늦췄다고 한다. 퇴계도, 유 교수도 자기 혼자만 차지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만큼 청량산은 아름다우면서도 고즈넉하다.

저녁식사를 위해 안동댐 하류의 헛제삿밥 식당을 찾았다. 헛제삿밥은 제사가 아닐 때 먹는 제삿밥이란 뜻이다. 넓은 들이 별로 없어 제삿날이나 잘 먹는 안동 사람들이 제사를 빙자해 한번쯤 잘 차려먹는 풍습이 전해 내려온 듯하다. 꼬치전과 간고등어구이가 나오고 나물을 고추장 대신 간장에 비벼먹는데 가난한 선비들이 헛제삿밥을 얼마나 반겼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헛제삿밥은 제사가 안 드는 날 해먹는 제삿밥이다. ⓒ 이대용

[지역∙농업보도실습]은 1학기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함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지역 이슈와 농업•농촌 문제에 대한 기자•PD 지망생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신설한 강좌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프로그램은 지역∙농촌 현장실습과 여행에 동참하는 교수가 현장에서 취재와 기사 틀짜기를 지도하고 나중에 첨삭까지 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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