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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재롱 예쁘지만 허리·관절엔 ‘골병’

기사승인 2013.09.28  04:4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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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대한민국 노인보고서] 황혼육아에 빼앗긴 자유 <상>

   
 
“애 보는 할머니들은 다 그럴 거예요. 다섯 시만 지나도 시계만 쳐다본다니까. 애엄마가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권오영(62ㆍ강원도 동해시)씨는 ‘즐겁고 여유로운 노후를 즐겨보자’며 지난 2009년 남편과 30년 가까이 운영하던 전자제품 대리점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즈음 큰 아들 내외가 아기를 갖게 되면서 권 씨의 삶은 계획과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 살아 온 강원도를 떠나 서울 아들네로 보따리를 싸서 옮겼다. 맞벌이 하는 아들내외가 육아 문제로 막막해 하는 것을 보고 아기를 맡아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손주를 어느 정도 키워준 뒤 강원도로 다시 돌아올 생각에 집은 처분하지 않았다. 대신권씨의 남편(65)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서울과 동해를 오가며 관리한다. 

사랑스런 손주를 키우는 보람과 행복이 작지 않지만, 평소 등산과 친목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활기차게 살던 권씨에게 친구 하나 없는 서울생활은 ‘징역살이’나 마찬가지다. 주말에는 아들 내외가 아이를 돌보니 외출을 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아는 곳도, 아는 이도 없어 그냥 집에 있게 된다. 

“한번은 애랑 둘이 있는데 그날따라 너무 힘이 부치는 거야. 너무 힘들어서 아들한테 전화해서 막 울었어요. 나 너무 힘들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아들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권씨 며느리는 얼마 전 둘째를 출산했다.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쳤지만 권씨는 적어도 향후 3~4년은 귀향과 ‘자유로운 노후’를 미룰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7년 손주양육의 훈장, 허리디스크와 관절염

젊은 사람들도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다 보면 지치는데, 나이와 함께 체력이 떨어진 노년층이 육아에 시달리다 보면 몸이 이곳저곳 고장나기 마련이다. 선서례(74ㆍ여· 서울 아현동)씨는 2000년 이후 7년간의 황혼육아로 심한 허리디스크와 관절염을 얻었다. 

“육십 넘은 나이에 밤낮으로 아이를 업고 키우다 보니, 이제 허리고 팔다리고 안 쑤시는 데가 없어. 하도 예쁘고 귀해서 자꾸 업어주다 보니 버릇이 됐어. 잠시 내려놓으면 울어대니… 손녀가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데, 학교 입학 전까지 7년을 꼬박 내 손으로 키웠지. 그때는 내 몸이 아파도 시간 없어서 병원도 못 가고 미련하게 그냥 참았지. 이젠 파스 붙이고 병원 다녀도 소용없어. 퇴행성 관절염 말기래. 지팡이 없이는 어디 나갈 수도 없어.”

선씨는 큰 아들이 늦은 나이에 결혼해 손녀를 안겨주자 마냥 예쁘기만 했다. 아들 내외가 모두 회사일로 바빴기에 선뜻 육아를 도맡았다. 하지만 젊은 시절 내자식 키우던 것과 60대에 손주 키우는 일은 달랐다. 결국 몸이 당해내질 못했다. 그래서 2년 전 결혼한 둘째 아들이 아기를 맡기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땐 ‘단칼’에 거절했다. 역시 맞벌이를 하는 둘째 내외가 서운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미 지치고 아픈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씨처럼 손주를 키우다 허리나 팔다리, 심혈관계 등에 병을 얻는 노인의 예는 많다.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자녀들이 미안해할까 봐, 혹은 나이 들어 생기는 당연한 증상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치료할 기회를 놓쳐 쉽게 중증이 되기도 한다. 지난 200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4년 간 일주일에 9시간 이상 손주를 돌본 60세 전후 노인 1만3392명을 조사했더니 동년배의 다른 노인들에 비해 심장병 발병율이 55%나 높은 것으로 나왔다. 나이와 함께 심혈관계에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 노인들이 육아로 인해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육체피로에 노출되면 호르몬 작용으로 쉽게 질환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강원도 원주시에 사는 어명자(66ㆍ여)씨의 경우, 갓난쟁이 손자의 양육을 맡은 후 개인시간을 잃게 되면서 가벼운 우울증까지 경험하고 있다. 어씨는 손자를 돌보기 전만 해도 일주일에 2~3차례는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다니고 교회에서 여신도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사회생활을 했지만 이젠 아기에게 얽매여 외출은커녕 친구와 길게 통화하는 것도 어렵다.

   
▲ 봉사활동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며 분주하게 살았던 어명자씨는 손자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예전과 같은 생활을 못하게 됐다. 하루종일 아이의 꽁무니만 쫓아 다닌다는 어 씨는 손자 말고는 별다른 낙이 없다고 말했다. ⓒ 엄지원

“내 생활이랄 게 있어야지.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애 밥챙겨 먹이고 씻기고 꽁무니 쫓아다니다보면 하루 해 지는데 뭐. 예전에 봉사 다니고 사람들 자주 만날 때는 거울도 들여다보고 화장도 좀 하고, 그렇게 신바람 나게 살았는데.. 사는 낙이 손자 하나로 줄었어.”  

전문가들은 노년층의 경우 각종 호르몬 변화와 급격히 저하된 신체기능 때문에 우울증에 노출되기 쉽다고 지적한다. 건국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유승호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신체활동과 정서교류가 더욱 중요하다”며 “이 때 개인 시간도 없이 말 못하는 어린아이와 종일 있다 보면 우울증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기분전환이나 두뇌활동을 통해 마음의 여유를 갖는 등 노력할 필요가 있고 무엇보다 가족구성원들이 아이 양육을 맡은 노인의 부담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양육 방식 차이로 자녀와 갈등도

예전 같지 않은 체력으로 손주를 돌보면서 심신이 지치는 것과 함께 양육방식 등을 둘러싸고 자녀세대와 갈등을 빚는 것도 황혼육아를 맡은 노년층을 속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지난 2012년 경기도가족연구원이 조부모 3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황혼육아 실태조사’에 따르면 39.7%의 노인들이 양육방식을 문제로 자녀들과 갈등을 빚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에 육아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경기(경련을 일으키며 우는 증상)를 보이는 아기에게 전통약제인 ‘기응환’을 먹이는 문제가 대표적이다. 기응환은 인삼, 사행, 웅담, 침향 등으로 만들어진 한방약으로, 70~80년대까지는 아이들이 경기를 하며 울거나 깜짝깜짝 놀랄 때 이 약을 특효약처럼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 출판되는 육아관련 지침서는 ‘신생아에게 기응환을 먹일 경우 진정효과로 인해 아이의 증상을 제대로 알 수 없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며 ‘먹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 기응환을 둘러싼 갈등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육아 관련 카페를 뒤흔드는 주제다. ⓒ 댓글 갈무리

외손자를 돌보고 있는 이미숙(59ㆍ여 ·경기도 양주)씨도 기응환 때문에 딸(32)과 다툰 적이 있다. 아기가 돌이 됐을 무렵 자면서 경기를 자주해서 “이럴 때 기응환을 먹이면 좋다”고 했더니 딸이 펄쩍 뛰더라고 한다. “너도 다 먹고 컸다, 아무 문제없지 않느냐”고 하자, “그렇게 좋은 약이면 왜 의사가 먹이지 말라고 하겠냐”며 딸이 팽팽히 맞서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인터넷의 여러 육아관련 카페에는 양육방식을 둘러싼 세대갈등이 종종 화제가 된다. 할머니들은 ‘우유는 제 시간에 정해진 양만 먹여라’, ‘낮잠은 정해진 시간에만 재워라’ 등 책에서 본 얘기를 줄줄 외며 잔소리하는 자녀가 밉더라고 털어 놓는다. 반면 젊은 세대는 ‘아이를 봐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런저런 민간요법을 맹신하는 부모님이 답답하다’며 호소하기도 한다.

자식 위한 희생 당연시 하는 한국 노인들

   
▲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 ⓒ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가까운 일본만 해도 조부모 손에 크는 아이들의 비율은 높지 않다. 지난 2010년 일본 후생노동성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 맞벌이 가정의 경우 만 2세 이하 아동의 17%, 만 3세 이상에서는 10% 미만이 조부모에게 양육을 맡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대다수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다. 반면 2010년 삼성경제연구소의 국내 맞벌이부부 대상 조사에서는 64.5%가 ‘주로 부모에게 자녀 양육을 맡긴다’고 응답했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의 류재광 연구원은 “일본의 고령자들은 은퇴 이후 삶의 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손주 양육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이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비교적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시설이 충분히 운영되고 있다는 차이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노인들도 ‘피할 수 있다면’ 황혼육아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 2012년 9월 서울시가 통계청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통계로 보는 서울 노인의 삶’에서 60대 노인들이 가장 희망하지 않는 노후생활로 ‘손자녀양육’이 1위로 꼽혔다. 반대로 가장 원하는 노후생활 1위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노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혼육아를 하는 노인들이 많은 것은 ‘아이 기르기 힘든’ 경제사회여건의 탓이 크다.

맞벌이가 늘어난 것에 비해 ‘일하는 엄마’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여전히 부족한 게 현실이다. 법으로 3개월의 출산 휴가, 1년의 육아 휴가가 정해져있지만 실제로 이를 다 챙겨 쓸 수 없는 직장이 많다. 걷기는커녕,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아이를 두고 회사로 복귀해야하는 엄마들은 월 100만원이 넘는 베이비시터(아기돌보미)와 부모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집에 영아반이 있기는 하지만, 믿고 맡길 만한 곳은 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녀들은 부모를 바라보게 되고, 자녀들의 사정을 빤히 알기에 부모도 거절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권오영씨는 “평소에 절대 손주 키우며 늙지 않겠다고 공언했었지만 갓난쟁이 두고 출근해야하는 아들과 며느리가 애달프고, 귀여운 아기가 낯선 사람 손에 자랄 걱정 때문에 ‘그래 내가 키우마’고 나섰다”고 말했다. 특히 가끔씩 뉴스에서 일부 어린이집 등의 아동학대 사건 등이 보도되면 ‘말 못 하는 어린 것한테 저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싶어 힘들어도 참게 된다고 한다.

자녀에게 양육비 받지만 큰 도움은 안 돼

손주를 양육하는 노인들의 경우 대부분 자녀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거나 ‘양육비’ 명목으로 용돈을 받고 있었다. 지난 5월 보건복지부의 의뢰로 육아정책연구소가 실시한 ‘2012년 전국 보육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적인 평균은 월25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 취재과정에서 만난 도시지역 할머니들의 경우 월 50만원에서 80만원을 받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인터넷 육아관련 커뮤니티에서 거론되는 평균 ‘용돈’ 혹은 ‘양육비’ 수준도 50만원 정도였다. 대체로 월 150만 원 정도를 지급해야하는 베이비시터에 비하면 훨씬 저렴한 셈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2년 조사에서 손주 양육을 담당하는 국내 노인들의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이 약 8.86시간으로 나타났으니, 자녀들로부터 월 100만원을 받는 다해도 시급이 5,000원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하지만 조부모들은 입을 모아 ‘돈 보고 손주 키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말한다. 이미숙씨도 “딸에게 양육비 명목으로 매달 50만원씩 받고 있지만, 아이와 함께 지내다 보면 과자값, 선물 등으로 나가는 푼돈이 많아 실상 남는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자녀를 기르고 교육시키느라 모든 것을 다 쏟은 노년세대 중 상당수가 황혼육아를 통해 다시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 2013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준비되지 못한’ 노후를 맞이한 우리나라 노인은 절반 가까이가 빈곤층이다. 가난은 질병과 외로움 등 노년의 고통을 증폭시킨다. 불편한 몸으로 남의 밭일을 하는 농촌 노인이나 지하철택배로 생계를 유지하는 도시 노인 등 가난한 노년은 죽을 때까지 ‘밥벌이의 구차함’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사설 요양병원에서 학대 받는 치매노인, 골방에서 혼자 숨을 거두는 고독사 등 비극적 현장도 소리 없이 늘고 있다. <단비뉴스>는 청년의 ‘가족’이자 ‘내일’인 노인의 삶에 주목했다. 그들의 현실을 생생히 드러내면서 ‘노인복지후진국’을 벗어나기 위한 과제를 점검하고, 독자와 함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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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 엄지원 기자 kim334@indian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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