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 세명대 특강

매일 아침마다 3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가 있다. 무려 13년째다. 책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글귀와 간략한 해설이 담긴 ‘아침편지’는 매일 누군가의 슬픔을 위로하고 좌절한 영혼에 용기를 주는 묘약이 되기도 했다. 10일 오후 충북 제천의 세명대 학술관 강당에 모인 2백여명의 청중은 바로 그 편지의 주인공인 고도원(61)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꿈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는 주제로 진행된 그의 강연은 가을에 날아든 한통의 편지처럼 청중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 10일 세명대 학술관 광장에서 열린 강연에서 고도원 아침문화재단 이사장은 청춘들이 '꿈 너머 꿈'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 박준용

“청와대에서 대통령 연설문 작성담당 비서관(1급)으로 일할 때예요. 한참 일하는데 갑자기 섬광처럼 고무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몸이 가라앉는데 ‘아, 사람이 이렇게 가는 구나’ 싶었죠.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날이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빵’ 터지기 전에 바늘구멍 하나 낸다는 마음으로 쓴 것이 아침편지입니다.”

격무 시달리던 청와대 시절 돌파구 찾으려 이메일 시작

그날이 2001년 8월 1일. 거의 매일 대통령 연설문을 쓰던 고 이사장은 당시 ‘거울을 보면 머리에서 김이 나고 있을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일하던 책상에서 일어서지 못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정신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대중화하고 있던 이메일을 통해 지인들에게 아침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읽는 데 30초에서 1분 정도 밖에 안 걸리는 짧은 글이었지만, 그에겐 숨 막히는 일상을 뚫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돌파구였고 위안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감명 깊게 읽은 책에서 발췌된 짧은 글귀와 간략한 해설이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그는 어릴 때부터 만들어온 독서카드를 뒤적여 아침마다 좋은 글귀를 선정한 뒤 그에 걸맞는 주석을 달아 편지를 썼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고도원의 아침편지>는 이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로 한정됐던 편지의 수신인은 그사이 326만명으로 불어났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과 문자로 받는 이들을 합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고 이사장은 이 같은 인기를 발판으로 2003년 ‘아침편지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구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에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였는데, 이듬해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승인을 받아 문화재단으로 등록했고 ‘아침편지’의 독자를 중심으로 12억원의 기금도 마련했다.

모든 산봉우리 밑에는 계곡이 있다

그는 아침편지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글쟁이’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다. 지난 78년부터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기자로 5년 간 일했고, 83년 <중앙일보>로 옮긴 후 주로 정치부에서 ‘글발’을 날렸다. 그러다 98년 청와대 연설문 담당 비서관으로 전업한 뒤 5년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심중을 대중의 눈높이로 전달하는 데 능력을 발휘했다.

▲ 고 이사장은 강연 중 '이조사(이주일과 조영남 사이)', '꿈박사' 등 다양한 자신의 별명을 소개해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박준용

하지만 기자가 되기 전,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산봉우리 밑에는 계곡이 있다”며 그늘졌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개했다. 대학시절 <연세춘추> 편집국장으로 일할 때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인용해 체제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는 이유로 필화(筆禍)를 겪었고,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로 제적되기도 했다.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전력 탓에 취직이 쉽지 않았고, 문방구 사업을 해보려다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꽤 오랜 시간 생활고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아내와 다툼이 잦았다. 자살충동도 느꼈다. 하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에도 오랜 꿈 하나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었다.

“그 때 우리 부부 두 사람이 작은 일에도 상처받고 서로 목숨 걸고 싸웠어요. 너무 지쳤던 어느 날, 다시는 싸우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이젠 ‘한강가자’고 안하겠다고 울먹이며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나는 꿈이 있고, 먹을 거 없으니까 꿈 먹고 살자’고 했습니다. 좋은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지금의 모든 경험이 재료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격려해줬지요. 그 꿈을 아내와 이야기 한 뒤부터 제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청춘의 가슴에 북극성을 띄워라

고 이사장은 강연에 몰입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슴에 북극성을 띄우라’는 표현으로 꿈을 가지라고 강조했다. 자신이 절망의 밑바닥에서 고통 받던 시절을 견디고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대중적 작가가 된 것도 꿈을 잃지 않은 덕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꿈박사’ 라는 자신의 별명도 소개했다.  

▲ 고 이사장의 강연을 듣고 있는 세명대 학생들. ⓒ 박준용

하지만 그는 “단순히 꿈만 꾸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꿈을 가진 청춘들도 “꿈을 이루고 난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궁극적으로 ‘꿈 너머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얻거나 어떤 자리에 도달한 뒤, 그 다음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손전등을 갖는 것이 꿈인 사람은 그것을 가졌다고 해서 끝이 아닌 것입니다. 기왕에 가는 인생 여정, 옆 사람에게도 비추려고 하는 순간 위대한 발걸음이 됩니다. 꿈을 꾸는 사람, 꿈을 이룬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지만 ‘꿈 너머 꿈’을 가진 사람은 위대해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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