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불패] 대산농촌문화재단 장학생 연수 참가기

‘농촌은 죽었다.’ ‘농업은 미래산업이다.’ 한국사회에서 농촌에 대한 시각만큼 분분한 것도 드물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농촌 현장을 둘러볼 기회를 대산농촌문화재단이 마련해주었다. 재단의 ‘농업CEO양성 장학생’ 6명, 그리고 재단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이 함께 운영하는 농업전문언론인양성과정 장학생 4명이 지난 9일부터 4일간 충남 홍성, 전북 진안∙완주 등지로 하계연수를 다녀왔다. (편집자)

하루 4시간 일하고 낭만 찾을 순 없지만…

충남 홍성군 홍동면은 ‘유기농의 메카’, ‘협동조합의 탄생지’라 알려졌지만 사실 주민들 삶이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다. 마을 주민들은 다만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약간 풍요롭다”고 말하는 정도다. 그러나 우리나라 농촌현실에서 그것은 예사롭지 않은 성과다. 외지인이 느끼기에는 주경야독과 행복이 공존하는 삶, 귀농을 꿈꾸는 도시민이 보기에는 부럽기 짝이 없는 농촌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홍동면 ‘마을활력소’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정민철(47) 젊은협업농장 일꾼이 막 일을 마치고 땀을 닦으며 말했다.

"헬렌 니어링이라는 미국 여자가 쓴 책 있잖아요. 4시간만 일하고, 4시간은 독서하고, 나머지 4시간은 또 뭐, 하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 사람도 30년 동안 꾸준히 농사짓고 난 뒤 막판에 그런 여유로운 삶을 산 거예요. 그 책 보고 귀농을 결심한 사람은 일찌감치 마음을 고쳐 먹으라고 권하고 싶어요.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해도 생계를 유지할까 말까 하는 게 우리 농촌 현실입니다. 농사라고는 생판 모르는 귀농자가 하루 4시간 일하고 낭만 찾다가는 망하기 딱 알맞아요."

▲ "헬렌니어링도 막판에야 여유롭게 살았거든요." '마을활력소'에서 강연 중인 정민철씨. 풀무학교 교사 출신으로 2년 전부터 청년협업농장 협동조합을 이끌고 있다. ⓒ 대산농촌문화재단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다만 다른 데 농부처럼 온종일 농사에만 매어 살지는 않는다. 농사가 ‘유일한’ 생계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사가 먹고 사는 모든 걸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이 될 때 농부는 하는 수 없이 ‘돈벌이’를 궁리하게 되고 농사는 생활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일에 구속되는 것이다. 이때 그는 농부일지언정, 한 가정의 아버지나 한 여인의 남편이나 마을의 주민으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다.

“물론 여기서는 무작정 하루 종일 농사만 짓지 않아요. 그러면 못살아. 이거 가지고 먹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은 평생 땅 일구고 소만 보고 살아야 해.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 귀농하려는 사람들 꿈꾸는 게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욕구도 있을 테고 여전히 하고 싶은 일도 있을 테고. 마을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싶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 마을은 그게 가능하거든.”

‘재능’을 나누는 마을

삶의 지향점이 조금 다르다. 홍동면 주민들은 낮에는 일하고 오후와 저녁에는 각자 가진 재능을 기부해 수많은 모임을 조직하고 이끌어간다. 이들이 모임을 꾸리는 방식은 도시에서 말하는 ‘재능기부’와는 다른 의미다. 기존 재능기부가 재능 있는 이가 남에게 베푸는 일방적 행동이라면 여기서는 쌍방향, 다방향이다. 모든 사람은 ‘재능’을 가지고 있고, 농촌 사람들을 이어주는 마을이라는 틀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 가능한 까닭이다.

상호교육과 배움, 그리고 재능을 통한 모임들이 협동조합으로 성장했다. 홍동면은 59년, 지역학교인 풀무학교 안에 생활협동조합을 꾸린 이래 생겨난 40여개 협동조합이 마을을 이끌어 가고 있다. 마을이 전국적으로 ‘협동조합의 본고장’이라는 찬사를 듣는 이유다.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 우리는 일도 하고 공부도 하는 사람이 되자.’ 풀무학교의 철학이다. 풀무학교는 엘리트를 만들고 출세하는 길을 가르치기보다 이웃이나 자연과 공존할 것을 가르친다. ‘더불어 사는 평민’이 학교의 목표다. 학교 이름 앞에 붙은 ‘풀무’는 대장간에서 쇠를 녹일 때 바람을 불어넣는 기구를 의미하는데,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재가 다시 마을을 만들고 지역에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학교의 바람을 이뤄낸 도구가 협동조합이다. 학생 스스로 필요한 물품이 무엇인지 회의를 하고, 물품을 구입하고, 구입한 물품 중 어떤 것이 좋은지 구분하는 작업을 해나갔다. 학생들은 자연스레 책임감과 민주주의 의식을 익혀갔다. 졸업생들은 3년간 협동조합 주인으로 ‘체득’한 경험을 토대로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각자 재능을 발휘하며 지역 일꾼으로 커갔다. 훌륭한 학생을 키워내면 도시로 가는 게 일반적인 타지역과 달랐다.

졸업생들은 마을에서 필요한 일을 꾸릴 때 자연스럽게 협동조합 방식을 택했다. 협동조합이 다른 형태의 기업이나 조직보다 여러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고 의견을 두루 나눌 수 있는 민주적인 조직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서서 ‘협동조합식으로 하자’고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한 달 100만원에 한 가족이 살 수 있다

마을에 뿌리내린 풀무학교 졸업생들이 제일 먼저 만든 것은 경제조직인 풀무생활협동조합과 신용조직인 풀무신용협동조합이다. 홍동면 안에는 이후 40여개 협동조합이 꾸려졌다. 육아, 교육, 취미, 목공, 원예, 의료, 건축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처음에는 서넛이 시작해 점차 더 많은 주민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여 협동조합으로 일궜다.

▲ ‘동네마실방 뜰’. 마을에 하나 남은 치킨가게를 협동조합 술집으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뜰'로 마실을 나온다. ⓒ 안형준

‘지역의 필요’를 포착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필수 요소를 갖추는 일에 있어서 ‘협동조합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농촌 지역에 취약한 교육과 의료를 담당할 협동조합을 만들면서 주민 생활의 질이 한층 높아진 게 그 사례다.

농사도 예외가 아니다. 주민 각자가 유기농 논밭을 일궈 생산한 농산품은 풀무생산자조직이나 홍성유기농영농조합에 분류, 포장, 판매를 일임한다. 이들도 협동조합 혹은 협동조합적 지향을 가지고 구성된 조직이다. 홍성 유기농 농산물은 아이쿱생협과 두레생협 등 전국매장으로 보내진다. 다양한 협동조합 간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역 차원의 프로그램 개발과 교육을 돕는 중간 지원은 마을활력소가 담당한다.

마을에서 자급하는 생활을 하면서 100만원 수입으로 한 달 살림을 꾸릴 수 있게 됐다. 많이 소비하고 많이 버리는 삶의 방식은 잊은 지 오래다. 동네 생활에 큰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은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협동조합을 스스로 이끌고 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이라는 하나의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협동조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젊은이도 나이 든 이도 농촌에서 재능을 썩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각자 농업을 하면서도 지역을 만들어갈 수 있는 동력원이 되어가면서 마을에 활력이 넘쳐났다.

기사 쓰는 재주가 있는 청년이 귀촌을 원하면 그 사람은 지역에 내려와 기자활동과 동네신문 제작을 맡길 수 있다. 농촌을 알고 농업을 아는 사진 전문가는 동네 사진작가가 될 수 있고 작곡을 공부한 사람은 동네 주민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 수 있다. 젊은협업농장 정민철 씨의 말이다.

“미술을 배운다고 가정해봐요. 도시에서는 학원에서 배우거나 미대를 가야 합니다. 농촌에서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몰려있으면 농한기에 하면 돼요. 농촌은 지역으로 묶여있고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지역이 농촌이니 재능을 풀기에 넓고 삭막한 도시보다 나은 거죠. 자기 재능을 푸는 게 돈을 벌거나 지식을 뽐내기 위한 게 아니에요. 애초 재능이 미술이고, 음악인 사람들이 재능을 마음껏 풀어내는 것뿐이죠.”

▲ 국영석 조합장은 '농민을 위한 농협'을 이야기한다. 고산농협은 농산물 고품질 균일화를 통해 농가소득을 한층 더 올린다. ⓒ 대산농촌문화재단

‘땅기운’ 받은 쌀 개발

전북 완주군 고산농협 국영석(51) 조합장은 둘러앉은 연수생들 손을 꼭 잡고 악수하며 90도 이상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지만 스무 살 때 마을 이장을 시작으로 2002년부터 4년간은 전라북도 도의원을 지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매우 아팠어요. 친구들 학교 갈 때 저는 밭을 갈았습니다. 잠도 안자고 농사에 매달렸답니다. 달빛이 아까운 날도 일했죠. 작지만 뜻있는 일, 그리고 내가 필요한 일에 집중했어요.”

그는 농민을 위한 농협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농협 놈들’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직원이 같은 생각을 하고 마음을 모으도록 했다. 정부 예산을 따기 위한 기획서 작성을 외주업체에 맡기지 않고 조사 하나까지 직원들과 함께 작성했다. 그는 농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생산물의 ‘고품질 균일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지, 퇴비, 종자, 물, 산소. 완주 농협이 관리하는 시설과 기관들은 다섯 가지 요소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고품질 균일화한 농산물을 생산한다. 우수한 작물 생산을 토대로 유통과 판매, 농촌 복지 실현까지 차근차근 이뤄냈다.

경축 자원화 센터에서는 소의 배설물을 활용해 자연순환농업을 위한 퇴비를 만든다. 농가에서 모은 소의 배설물과 수분을 흡수하는 왕겨를 섞어 180일간 발효시키면 고품질 퇴비가 생산된다.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화학 퇴비는 땅을 10년도 채 못쓰게 하는 반면 이 센터에서 생산한 퇴비는 땅 힘을 높여 지속가능한 농업을 하게 한다.

고산농협 산지유통센터 광역친환경농업단지는 고산면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집하, 예비냉장, 저온, 선별, 포장, 저장한다. 일반적인 유통센터가 쌀의 단순 도정작업과 저장창고 역할을 하는 반면 이곳은 GAP인증(농산물우수관리제도)을 받기 위해 설비까지 개발해 품질 좋은 농산품을 생산한다. 그 결과 완주 농협 브랜드 ‘땅기운 쌀’을 개발하고 전라북도와 함께 쌀 상표 ‘자연섬 米’를 만들었다.

완주농협 구법용(56) 경제본부장은 ‘규모가 작은 완주농협에서 시설을 갖춰 주변 지역 생산품도 끌어들여 고품질로 가공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고산 농협에서 포장한 질 좋은 생산물로 산지 직매도 하고 대전지역 어린이집의 급식 음식재료로도 납품한다”고 말했다.

▲ 완주 용진농협의 농산품 가격은 농민이 정한다. 모든 농산물에 생산농민의 이름과 전화번호, 얼굴 사진이 함께 진열돼 있다. 이른바 '얼굴있는 농산물'이다. ⓒ 안형준

농민 스스로 정하는 가격

최근 협동조합 열풍을 타며 우수사례로 주목받은 완주 용진농협 로컬푸드 직매장은 처음 50개 농가의 참여로 시작했다. 지금은 완주지역 농가 350가구 이상이 물품을 공급한다. 아침 열 시가 채 안 된 시각 60평(198㎡)쯤 되는 매장에는 주민 등 50여 명이 몰려 금방 물품들이 동나기 시작했다. 하루 매출이 3,000만원 가량 된다.

농민 사전교육을 철저하게 했고 매장관리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용진농협 직매장은 소량 다품목을 원칙으로 농민이 생산, 운송, 선별, 포장 그리고 가격결정과 재고관리까지 스스로 한다. 완주 봉동에서 오전 10시 장을 보러 온 이호영(37∙여)씨는 품질 때문에 이곳에 온다고 말했다.

“사실 가격은 집 앞에 서는 장과 비슷해요. 하지만 과일 같은 것은 맛이 정말 좋아요. 처음에는 농협매장인가보다 하고 왔어요. 그런데 둘러보고 매대에 있는 농민들의 사진과 설명을 보고 나서 관심이 많아졌어요. 지금은 완주군청 등 홈페이지를 통해서 용진농협뿐 아니라 완주 지역 여러 곳을 찾아다녀요.”

▲ 용진농협 로컬푸드직매장은 개장하면 일찍 가야 농산품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 안형준

국영석 조합장은 ‘내가 힘드니 저 친구도 힘들겠구나’ 공감하는 것이 협동조합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고장난 경제시스템과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각 개인의 삶을 살려 지역을 연결하는 방안을 찾는 데로 나아갔다. 비판에서 끝내지 않고 대안을 찾았다.

“중요한 것은 개별 사업의 성공이 아니라 협력적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농촌과 지역사회에 애정을 가지세요. 이것은 분명 미래에 연결될 거예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재능을 발휘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분명 변화와 성공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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