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 신문’ 인상…‘진보적 정론지’ 대신 ‘진보언론’ 천명을
내부동력·외부지원 결집하려면 ‘진보의 가치’ 중심 논조 펴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내달 15일이면 <한겨레>가 창간 25주년을 맞는다. 세계언론사에 유례없는 국민주 신문으로 출발해 거대자본과 권력의 핍박 속에서도 진보언론의 생명력을 면면히 유지해온 것이다. <한겨레>는 진실한 정보를 얻을 마땅한 수단조차 없던 시절, 대중에게는 세상을 내다보는 맑은 창이었고, 권력자에게는 적나라한 모습을 여지없이 비추는 거울이었다. 수구·보수세력이 주도하는 정치·언론지형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약간이나마 보정해주는 지렛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25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축하만 해줄 수 없는 이유는 신문 환경이 날로 나빠지고 있는 가운데 <한겨레>가 내부 활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공장건물 2층에 편집국이 있던 창간 초기, 1판이 나왔는데도 퇴근하지 않고 남의 기사까지 읽어주다가 근처 음식점으로 옮겨 갑론을박하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서툰 점이야 많았지만 독자들은 그 무지막지한 비판의 칼질을 보기 위해 매일 <한겨레>를 기다렸다.

25년간 <한겨레>는 많이 ‘세련’되고 ‘정교’해졌다. 그러나 어쩐지 ‘프티부르주아’, 곧 ‘소시민’이 만드는 신문이 되어간다는 인상을 받는다. 초기에 견주어 사회면과 경제면은 노동자보다 기업주·경영진 기사, 서민들 애환보다 기득권층 관심사가 늘어난 듯하다. 블루칼라보다 화이트칼라, 지방보다 서울, 대중교통보다 자동차 얘기가 늘어났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기자들의 취재영역이 자신의 주변인물과 생활권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정치면이 정치에 대한 대중의 여망을 수렴하기보다 정치인들의 입놀림과 이해타산에 상당 부분 좌우되고 있는 건 아닌가? 진보진영은 지난 대선에서 패했다고는 하나 진보정치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대선 이후 <뉴스타파>를 비롯한 새 매체에 쏟아지는 관심은 87년 양김 분열에 따른 대선 패배 후 <한겨레>에 쏟아지던 열기를 연상하게 한다. 기성 진보언론 중에서도 일부 인터넷신문 후원자수와 주간지 구독자수가 급증한 것이 <한겨레>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마침 <한겨레>가 창간 25주년을 맞아 ‘미래기획 태스크포스팀’을 꾸렸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동안 관성으로 굳어졌던 취재보도의 목표와 행태를 전면적으로 점검하고 반성할 것을 찾아내 재도약의 일대전기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그 팀이 인터뷰하러 왔을 때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겨레>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일이라고 본다. 정체성 혼란이야말로 내부 동력을 떨어뜨리고 외부 지원을 단절시키는 요인이다.

<한겨레>는 초기에 민주·민족·통일을 3대 창간정신으로 내걸었으나, 언젠가 지면개편을 하면서 ‘진보적 정론지’가 목표 개념으로 등장해 기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 중에는 아직도 창간정신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많다. 15일에도 한 남성 독자가 시민편집인실로 전화해 ‘미, ‘북 비핵화 땐 동아시아 MD 철수’ 중국에 제의’ 기사 등을 예로 들며 “미-중 관계만 부각되고 남북한의 자주적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북 관련 사안을 다룰 때 창간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적 정론지’라는 구호에는 <한겨레>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가 내포돼 있다. ‘진보’는 이제 하나의 수식어가 되고 ‘정론’이 편집목표가 된 건가? 그렇다면 <한겨레>의 ‘진보성’은 구체적 가치체계로 설명되기보다는 ‘정론’이라는 모호한 말 속에 숨어버린 꼴이다. 사실 ‘정론’이니 ‘불편부당’이니 하는 사시는 내걸 필요도 없다. 제대로 된 신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 오히려 황색지가 상업주의와 편파성을 감추기 위해 그런 사시를 내거는 경우가 많다. 루퍼트 머독 소유 매체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미국에서 가장 편파적이고 선정적인 <폭스티브이>(FoxTV)의 사시가 ‘불편부당’(Fair and Balanced)이다.

심지어 <한겨레> 편집국에는 소수이긴 하지만 스스로 ‘진보언론’으로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까지 있는 듯하다. ‘진보언론’은 진보세력의 기관지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보수 대 진보의 설정은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기득권 세력의 프레임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유럽 언론은 아예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보도 표준을 천명하고 일탈자에게는 제재를 가한다. <비비시>(BBC)에 2만명 직원이 있고 노동당원이 다수지만 선거가 끝나도 편파성 시비가 일지 않는 것은 그 덕분이다. <비비시> 보도지침(Editorial Guidelines)의 부제가 ‘가치들과 표준들’(Values and Standards)이다.

<가디언>(Guardian)도 마찬가지다. 이 신문은 대체로 노동당을 지지하지만 블레어 정권이 우경화할 때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고, 캐머런의 보수당이 감세정책을 포기하고 의료복지체계를 확충하겠다고 하자 지지를 하고 나섰다. <가디언>은 이런 가치 중심의 논조와 베를리너판 도입으로 영국의 주류가 보는 신문, 전세계 신문이 벤치마킹하는 신문이 됐다. 문재인·안철수·김한길에 대한 평가도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잣대로 삼으면 된다.

유럽의 신문들은 제호 자체가 가치지향적으로 정해진 것이 많다. <가디언>의 원래 제호는 <맨체스터 가디언>이었는데, 공장지대인 맨체스터 주민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프랑스 좌파신문 <리베라시옹>(Liberation)은 사르트르 등이 창간했는데 ‘해방’이라는 뜻이고, <뤼마니테>(L’Humanite)는 ‘인류애’란 뜻이니, 제호부터 ‘노동해방’ 그리고 ‘분배’와 ‘연대’를 표방한다.

사실 <한겨레>라는 제호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겨레신문 기자 시절 대만에 취재를 간 적이 있는데 대만 정부 신문국에서 ‘한민족신문(韓民族新聞) 기자’라는 명찰을 달아주었다. 다문화 시대를 맞아 <한겨레>의 의미를 한민족뿐 아니라 ‘모두가 한 겨레’라는 뜻으로 확장하면 어떨까?

수구·보수가 과점한 한국의 담론시장을 고려할 때 <한겨레>의 역할은 분명 ‘진보언론’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뤄지는 나라에는 진보·보수 정당이 양립해 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보수 언론의 양립이다. <한겨레> 내부에서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위한 토론이 치열하게 벌어지길 기대한다. 현실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는 단순명료한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다.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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