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있는 서재]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어머니 제삿날에 십 년 전 ‘그날’처럼 눈이 내렸다. 아버지는 눈길이 위험하니 설에 오라 했다. 그래서 어머니 제사상 차림을 올해는 내 손으로 하지 못 했다. 눈과 함께 장례식 날 풍경도 되살아났다. 검은 상복 위로 눈이 쌓이는데도 털어낼 의욕조차 없이 멍하니 어머니를 영결했다.
 
아침부터 쌓인 빨래를 하고, 미루던 과제도 하고, 흐트러진 책들도 정리했다. 뭔가 열심히 해야만 그날의 기억을 떨쳐버릴 수 있을 듯해서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점점 더 기억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사진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도, 그 사진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나도 여전했다. 이제껏 내 나름대로 ‘힐링’이라고 해왔던 행동들이 소용이 없었다. 빨래를 하고 나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얼룩처럼 내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기는커녕 덧나 있었다.

애먼 힐링은 회피나 다를 바 없다. 상처를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어쭙잖은 대안이다. 그 대가는 당사자가 치르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말로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상술’인 줄 알면서도 남몰래 힐링 도서를 뒤적이고, 집안에서 그녀 이야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다른 화제를 꺼내 상황을 모면해왔다. 치유를 위해서는 상처입은 부위부터 확인해야 했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찾은 힐링은 한 순간 고통을 버티는 데만 효능이 있는 진통제였다. 나는 그렇게 앓아왔다.

나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지언정 ‘애도’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 했다. 그 사람의 죽음에 의미를 두기보다 살아있을 때 모습이나 남긴 말을 되짚어 보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죽은 이들은 어디선가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도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행여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 내 안부를 묻는 이에게는 태연히 답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속였다.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런데 십 년 만에 결국 들통났다. 그녀의 기일에 참석하지 못한 나를 위로하는 연락이 꽤 많이 왔다. 하나같이 며칠 전 일 같다며 말하는 목소리들은 나 못잖게 태연했다. 누구는 국화꽃 대신 그녀가 좋아한 단아한 꽃바구니를 가져왔다고 하고, 누구는 장례 이후 처음으로 그녀를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큰딸 없이도 아내의 제사상을 잘 차렸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녀를 ‘애도’하기 시작했고 딸인 나보다 먼저 상처를 마주했다. 그들은 도리어 그녀가 떠난 뒤 초연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나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시간만 지나면 자연히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표지

작품에서는 유일하게 엄마만 ‘나’라는 목소리를 갖는다. 딸과 아들, 남편은 ‘너, 그, 당신’으로 표현된다. 작가는 엄마에게 엄마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그녀의 ‘엄마’를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느라 삼십여 년이 필요했다고 한다. <엄마를 부탁해>는 인고 끝에 태어난 ‘반(反) 힐링 도서’인 셈이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의 비결이나 어디서 들었을 법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공감하려 애쓰는 힐링 도서들 반대편에 서있다. 수많은 힐링 도서가 고통은 최소화하면서 회복은 자연스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 말을 믿었던 터라 상처를 바라보기보다 숨기는 데 급급했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아프지만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상실의 인정에서 비롯한다. 소설은 첫 장부터 ‘너’를 주어로 쓴다. 읽는 이들은 졸지에 모두 ‘엄마를 잃은 지 일주일째’인 상태가 돼버린다. 엄마를 소재로 한 이 소설이 국내에서 200만부 판매 기록을 세우고 31개국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었던 힘은 ‘죄의식’에서 비롯된다. 애도가 지속되려면 죽음이 개별적인 선에서 멈추지 않고 공적 죽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의식’을 느낄 만한 장치가 필요하다. 
 
<엄마를 부탁해>는 인위적인 설정이나 노력 없이 가족적 차원에서 희생된 ‘엄마’를 애도의 대상으로 삼게 했다. 모성애를 너무 신성화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비약이다. 굳이 ‘엄마’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엄마’만큼 보편적 죄의식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드물 뿐이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십 년이 흘렀지만 나는 매일 엄마를 잃는다. 하지만 더는 힐링이 필요한 슬픈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됐다. 다만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곁에 두고 바라봐야 할 애도의 대상이다. 시인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다. 이제야 엄마의 죽음과 내 삶의 경계에 꽃 한 송이 필 것만 같다.


글쓰기가 언론인의 영역이라면 글짓기는 소설가의 영토입니다. 있는 사실을 쓰는 것이 글쓰기라면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게 글짓기입니다. 그러나 언론인도 소설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단비뉴스>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서재’ 개관을 기념해 이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소설을 읽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이봉수 교수 첨삭을 거쳐 이곳에 실립니다. 우선, 방학 동안 학생들이 소설을 읽고 써낸 에세이 중 몇 편을 골라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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