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후배 언론인들 ‘투쟁’ 응원하는 성유보 위원

37년 전, 그들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며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하면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고, 신문방송은 독재 정권의 참상에 대해 한 줄도 보도할 수 없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 피디(PD), 아나운서 등 150여명은 집회를 열고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선포했다. ‘보도에 외부간섭을 배제한다’, ‘기관원은 출입하지 마라’, ‘언론인 불법연행을 거부한다’ 등 3개 조항이 핵심이었다.

“사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전에도 언론자유를 지키자는 ‘수호선언’은 몇 차례 있었어요. 그런데 선언만 하면 뭐합니까. 아침마다 정부 기관원이 신문사로 찾아와 기사를 다 자르고 내용에 제목까지 마음대로 바꿔버리는데…. 그래서 언론자유란 게 수호선언만으로는 안 된다, ‘실천’을 해야 한다고 해서 대회를 연 거죠.”

▲ 실천선언 후 다 함께 편집국에서 "자유언론 만세"를 외치는 기자들. ⓒ 동아투위

박정희 독재에 맞선 언론자유 운동에 광고탄압과 해고로 보복

선언 이후 기자들은 행동에 나섰다. 경영진의 거센 방해를 무릅쓰고 10월 25일 자유언론수호대회 결의문을 동아일보 1면에 싣는데 성공했다. 그간 지면에 올리지 못했던 재야인사와 인권운동가에 대한 기사도  실었다.

이런 움직임이 전 언론계로 확산되기 시작하자 박정희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빼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광고란을 하얗게 비우고 신문을 찍어야 했던 ‘백지광고 사태’다. 그러자 동아일보 사측은 경영난을 구실로 투쟁을 주도한 기자들을 잘랐다. 1975년 3월, 단식농성 중인 기자들을 깡패를 동원해 쫓아내는 등 150여 명에 대한 무자비한 해고가 진행됐다. 당시 보도제작인력의 약 70%에 이르는 규모였다.

▲ 동아투위 결성 34주년(2009년 당시).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 동아투위

그 후 37년, 강산이 네 번 가까이 변했지만 그들의 외로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국가를 상대로 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의 손해배상소송에 대해 항소심재판부인 서울고법은 지난달 23일 ‘시효가 끝났다’며 기각했다. 이명순(67) 동아투위 위원장 등 회원들은 ‘불법공권력 행사에 대한 책임을 꼭 물어야 한다’며 대법원까지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판결을 이틀 앞두고 있던 지난달 21일, 동아투위 싸움을 평생 함께 해 온 성유보(69•한겨레 초대 편집국장) 위원은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언론 상황도 당시와 비슷한 데가 많아 착잡하다고 말했다.

‘개와 기자는 출입 금지… 기자란 게 부끄러워’

▲ 동아투위에 대해 설명중인 성유보 위원. ⓒ 손지은

성 위원과 동아투위를 함께 해 온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은 얼마 전 한 인터넷 언론에 쓴 글에서 “1973년 모교에 데모를 취재하러 갔다가 농성장 입구에서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란 팻말을 보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부끄러움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의 기폭제가 됐다. 그로부터 40여 년 후, 이명박 대통령 치하의 문화방송(MBC)과 KBS 기자들은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현장 등에서 시위대에게 쫓겨나고 ‘김비서 방송’ 등의 조롱을 받고 있다. 독재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권력 감시에 무능하고, 현실 왜곡을 일삼고 있는 언론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비등점을 넘은 것이다. 결국 지난 1월 MBC 노조를 시작으로 KBS, 와이티엔(YTN), 연합뉴스 등에서 언론인들이 줄줄이 파업에 나섰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각성이 확산된 것이다.

“파업하는 형식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추구하는 가치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성 위원은 해직기자들이 <뉴스타파> 등 대안언론을 만들어 그동안 못 했던 얘기를 쏟아놓고 있는 것에 대해 1985년 동아일보 해직자 등이 <말>지를 만들어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것 등과 본질적으로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무겁고 심각하기만 했던 70년대와 달리, 요즘은 국민과 함께하는 콘서트 등 ‘즐기면서’ 파업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해직이나 징계, 고소고발을 당하고 월급도 못 받고 있는 후배 언론인들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한편으론 안쓰럽다고.

“해직된 뒤 우리는 매일 아침 여관방으로 출근하며 시위를 계속했어요. 먹고 살아야 했으니 생업을 바꿔가며 투쟁했지. 그런데 다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거든. 위(정부)에서 방해하니 어디 취직이 되나. 그래서 이명순씨 같은 경우 장인이 하던 한약방에서 서툰 솜씨로 약재를 자르다 손도 다치고…. 남대문시장에서 사과도 팔고 그러면서 다들 어렵게 살았지. 나도 당시에 아들이 갓 돌이었는데 이제는 마흔이 다 됐어요. 가족들이 이해해주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당시엔 정권의 탄압과 감시가 노골적이었다. 성 위원은 ‘불온서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기도 했다. 정보기관은 성 위원이 언젠가 친구들과 바둑을 두며 ‘모택동 수법’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빨갱이’라는 증거라며 몰아세웠다고. 당시 함께 취조를 당했던 기자 중 한 명은 심한 고문으로 정신이상 판정을 받았다. 나중에 한겨레신문을 창간한 송건호(해직당시 편집국장), 안종필 등 고문․투옥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다 숨진 동아투위 위원도 20여명에 이른다고 성 위원은 말했다.

“박해 받을 것이 두렵다면 왜 언론인을 합니까?”

▲ 성유보 위원은 후배 언론인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 손지은

“저희가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 37년이란 긴 세월 동안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돈이나 권력보다는 ‘자유로운 언론’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철학과 가치관인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스펙’은 많이 쌓는지 몰라도 철학은 없어 보여요.”

언론인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성 위원은 ‘사물을 누구의 눈으로 볼 것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권이나 자본이 아닌, ‘국민의 눈’으로 현실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간절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버리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자를 하면서 명예와 돈, 자유를 다 가질 수는 없어요.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요. 박해받을 것이 두렵다면 왜 언론인을 합니까?”

백발이 성성한 작은 체구의 노인. 그러나 권력의 폭압에 맞섰던 ‘진짜 언론인’의 기개가 당당했다. 민주언론협의회와 <말>지, <한겨레> 창간 등을 통해 언론의 지형과 풍토를 바꾸는 데 기여한 선구자의 풍모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지난 2001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된 동아투위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사의 공개사과, 그리고 국가의 손해배상을 꼭 받아내겠다며 후배 언론인들도 힘 있게 싸워줄 것을 부탁했다.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