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충북 제천 ‘극단 마중’이 선보인 연극 두 편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운다~.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가아~안다.”

지난달 7일 오후 3시 무렵 충북 제천시 고암동 금용아파트 상가 지하 1층 입구에서 ‘봄날은 간다’ 노랫소리가 구슬프게 새어 나왔다. 20여 개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 배우 9명이 음원에 맞춰 대사를 연습하고 있었다. 공실이 된 마트를 개조한 70여 평(231m²) 규모의 소극장에는 목재와 합판으로 만든 무대 위에 커튼, 스피커, 의자 등이 설치돼 있었다. 연극 <친절한 미경씨>의 주인공을 맡은 손미경(52) 씨가 “나는 지적장애인이지만 제발 좀 내버려 둬요!” “장애는 죄가 아니다!”라고 외치자 극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무대 위 배우들은 모두 1~2급의 지적장애인이었다. 대부분 동작과 목소리가 크고 우렁찼다.

무대에 서고픈 열망으로 진지하게 연습

▲ 연극 <친절한 미경씨>의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는 주인공 손미경 씨(왼쪽)와 반승호 씨. ⓒ 이주연

이들은 지난해 11월 26일 이 소극장에서 <친절한 미경씨>와 <그놈의 사랑>을 처음으로 공연했다. 첫 공연에서는 녹음된 음성을 틀어놓고 연기했다. 1시간가량 이어지는 연극의 대사를 배우들이 모두 외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공연을 위해 준비한 이번 리허설에서는 <친절한 미경씨>의 대사를 무대에서 직접 하기로 했다. 두 연극의 대본을 쓴 민병삼(54) 연출가는 “대사도 짧고 이해하기가 쉬운 연극이기 때문에 한 번 외워서 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연습 중인 배우들은 모두 사회적 협동조합인 마중장애인주간보호센터가 지난해 4월 장애인들의 자기표현을 돕고자 만든 ‘극단 마중’ 소속이다. 센터 프로그램의 하나였던 연극에 장애인들이 열정을 보이자, 아예 극단을 만든 것이다. 최연소 반승호(28) 씨부터 최고령 손미경 씨까지 여자 5명 남자 4명의 배우로 구성됐다. 이들 중에는 긴 문장을 연결해서 말하지 못하는 배우도 있다. 그러나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은 하나같이 뜨겁다. 민 연출가는 “(장애인들이) 배우가 되어 자기의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며 긴 안목의 도전임을 밝혔다. 

현재 마중 극단에는 11명의 장애인 이용자와 4명의 사회복지사가 있다. 이들은 극단 결성 후 매주 연극 연습을 했고, 약 6개월 만에 첫 소극장 공연을 이뤄냈다. 사회복지사들은 무대를 만들고 장비를 설치하는 등 궂은일을 도맡았다. 당일 오후 2시와 4시 두 차례 진행된 공연에는 이상천 제천시장과 제천시 장애인가족지원센터 관계자, 배우들의 가족 등 80여 명이 참석해 박수와 웃음, 환호로 배우들을 격려했다. 

사회의 편견과 ‘사랑앓이’ 등 아픈 삶 드러내 

▲ 비어있는 마트를 개조한 소극장에서 연극 <친절한 미경씨>를 관람하는 관객들. 마중장애인주간보호센터의 사회복지사 4명이 직접 공사를 맡았다. 관객석 뒤쪽으로 연출가가 무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됐다. ⓒ 이주연

<친절한 미경씨>의 첫 무대는 손미경 씨가 경쾌한 음악에 맞춰 고갯짓을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지적장애 2급인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데, 장애인에 관한 편견 때문에 마트에서 도둑으로 몰린다. “당신들과 나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제발 좀 내버려 둬요!” 손 씨가 외칠 때 관객도 함께 분노하는 마음이 됐다. 그렇다고 마냥 무거운 연극은 아니었다. 버스 기사 역의 정수흠(43) 씨가 운전할 때마다 어깨춤을 추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두 번째 극 <그놈의 사랑>은 주인공 정수흠 씨의 ‘아픈 사랑’을 그렸다. 1990년대 어느 중소 도시 공장. 정 씨는 같은 장애인인 김혜경(39) 씨를 좋아해 매일 따라다닌다. 사랑을 앓아 밥도 잘 먹지 못하는 아들에게 엄마 역의 손미경 씨는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묻는다. 답을 들은 후 엄마는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장애 2급을 가진 아들에게 엄마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며 “우리는 안 돼”라고 타이른다. 

▲ 여자 문제로 걱정하는 아들 역의 정수흠 씨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손미경 씨. ⓒ 이주연

수흠과 혜경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공장에서 직원들은 쉴 틈 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스피커에서는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가 흘러나온다. 혜경은 과로 끝에 쓰러지고 끝내 깨어나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여러 관객은 손을 모으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했다. 민 연출가는 “실제로 사랑은 극단 배우들의 최대 관심사”라며 “이들은 사랑이 절박해서 몸살을 앓기도 한다”고 말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가장 빛나는 별

“마중의 시작과 끝 최동건,
마중의 막내 푸릇푸릇한 젊은 청춘 반승호, 
한없이 여린 여자 손미경, 
마중의 듬직한 일꾼 김혜경, 
머리부터 발끝까지 애교 정어리 김영아, 
마중의 멋쟁이 신사 정수흠,
마중의 똑순이 모르는 것이 없는 이하은,
마중의 엄마와 아들, 현욱이와 강성숙.”

막이 내리고 안치환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울려 퍼지자 9명의 배우들이 민 연출가의 소개말에 맞춰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춤사위를 보였다. <그놈의 사랑>의 주인공 정수흠 씨는 가수 박남정의 ‘ㄱㄴ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배우들의 인사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배우들이 입은 노란 조끼에서 ‘세상에 가장 빛난 별은 바로 너야’라는 검은 글씨가 반짝였다.

▲ 연극이 모두 끝난 후 민병삼 연출가의 소개에 맞춰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배우들. ⓒ 이현이

민 연출가는 “배우들이 지적장애인으로 세상 변두리에서 구박을 받다가, 무대에 오르니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대학로에서 1년 동안 연극을 배웠다는 민 연출가는 마중 배우들의 실제 삶을 두 편의 연극 대본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분들 인생 속에 들어가면 모든 게 스토리”라고 말했다. 이어 “장애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아픈 현실과 희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관객들한테 가장 잘 와 닿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친절한 미경씨>의 주인공 손 씨는 요즘 평일 점심식사 후 오후 4시까지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는 제천을 넘어 전국 각지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꿈꾼다. 손 씨는 “(무대에 서는 게) 떨릴 줄 알았는데 떨리지 않았다”며 “할수록 더 재미있고 활기찬 생활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역할을 시도해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에게 출연료 줄 수 있었으면”

▲ 마중의 배우들과 민병삼 연출가가 연극 연습 중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배우들은 “선생님 좋아요”라고 말했다. ⓒ 이현이

마중은 현재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민 연출가는 지난 공연에서 학생 역과 친구 역을 맡았던 반승호 씨를 주인공으로 <청춘>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젊은 장애인이 가정과 직장에서 겪는 차별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민 연출가는 장애인보호센터의 예산 등으로 어렵게 꾸려가는 극단을 위해 재정 지원이 확충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조명과 관객석 의자 등 소극장 시설도 아직 미흡하다”며 “배우들의 재능이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이분들의 능력치에 맞게끔 출연료를 드리고 싶은 게 희망”이라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2019년 5월 발표한 ‘장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 및 분석연구’에 따르면, 전국의 장애인 예술 활동가는 2만 5722명이다. 연극분야에서는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극단 애인’ 등이 있다. 휠은 2001년 창단된 대한민국 최초의 장애인 극단으로, 직접 찾아가는 장애인식개선 교육연극을 한다. 2007년 발족한 극단 애인은 지체장애인과 지적장애인 배우 등의 1인극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해외에서는 영국의 극단 하이징스(Hijinx)가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의 합동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편집: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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