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학부 시절 유일하게 B를 넘기지 못한 과목이 있다. 3학년 1학기 때 수강한 ‘페미니즘과 현대문화’다. 수업을 들었던 2019년 당시 오프라인, 온라인 할 것 없이 페미니즘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뜨거웠다. 페미니즘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여느 학부 수업이 그러하듯, 4개월 만에 페미니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적도 나빴다. C+를 받았다.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고 시험도 영어로 치르는 ‘국제어 강의’였다는 핑계가 작은 위안거리였을 뿐이다.

강의에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을 만났다. 1995년 네덜란드 영화감독 마를린 호리스가 연출한 작품이다. 독특한 영화였다. 주인공 안토니아와 그의 딸 다니엘, 손녀 테레사와 증손녀 사라까지 4대의 일대기를 그렸다. 영화를 관통하는 큰 사건 하나 없이 소소한 일상이 이어진다. 안토니아와 다니엘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다니엘이 딸 테레사를 낳고, 다시 테레사가 딸 사라를 낳으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안토니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스펙터클 하나 없이 소박했던 영화가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무엇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을까.

잔잔한 서사가 그려내는 ‘연결과 순환’ 이미지

<안토니아스 라인>은 잔잔하다. 안토니아와 다니엘, 테레사와 사라를 중심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시간 순서대로 담는다. 어머니 임종을 지키기 위해 안토니아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그가 딸 다니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생활을 꾸리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다니엘이 미술학교에 다니는 일상이 순차적으로 그려진다. 영화를 전체로 놓고 보면 액자식 구성이다. 첫 시퀀스에 죽음을 앞둔 안토니아가 등장하는데, 영화는 이 시퀀스를 마지막 시퀀스와 연결한다. 영화의 주된 서사는 안토니아와 다니엘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두 번째 시퀀스부터 시작된다. 이후 영화는 시간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한다.

▲ <안토니아스 라인>은 죽음을 예감한 안토니아가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토니아가 부엌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 장면(위)은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시절 안토니아로 바뀐다(아래). ⓒ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갈무리

영화가 잔잔한 이유는 주인공의 목표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 대부분은 뚜렷한 목표를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히어로 영화 <스파이더맨> 주인공은 안타고니스트로부터 가족이나 사회를 지키는 것을, 로맨스 영화 <건축학개론> 주인공은 사랑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주인공의 목표가 뚜렷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과정이 지난할수록 영화에 긴장감이 생긴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안토니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안토니아가 여러 인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관조할 뿐이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기승전결도 뚜렷하지 않다. 영화 중반에 자신의 여동생 디디를 성폭행한 전력이 있는 피트가 15년 만에 마을에 돌아와 어린 테레사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 뒤 피트는 자신의 남동생 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시퀀스는 스무 살이 된 테레사의 대학 생활로 넘어간다. 충격적인 사건은 차분하게 매듭되고, 영화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후 영화는 테레사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시몬과 연인이 되고, 딸 사라를 낳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그저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담하게 그린다. 긴장감을 고조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없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긴장감을 순차적으로 쌓아가며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영화의 서사 구조로부터 자유롭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긴장감을 쌓는 대신 ‘연결과 순환’이라는 테마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연결은 종횡으로 이어진다. 안토니아에서 다니엘로, 다니엘에서 테레사로, 테레사에서 사라로 이어지는 4대는 종적 연결이다. 중심 인물과 주변 인물 사이의 관계는 횡적 연결이다. 안토니아는 아내 없이 다섯 아들을 키우는 바스와, 다니엘은 테레사의 가정교사 라라와, 테레사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시몬과 연인으로 만난다. 마을에서 바보 취급을 받는 루니 립과 친오빠에게 성폭행 당한 뒤 안토니아와 함께 사는 디디 사이에 이뤄진 결혼, 테레사와 안토니아의 오랜 친구 크룩 핑거 사이 이뤄진 정신적 교류는 다양한 형태의 횡적 연결을 보여준다.

영화는 연결을 통해 서사를 확장한다. 안토니아에서 사라까지 이어지는 가족사는 서사의 뼈대를 이룬다.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건 4대가 주변 인물과 만드는 관계다. 안토니아와 바스, 다니엘과 라라, 테레스와 시몬이 맺은 연인 관계뿐 아니라 안토니아를 따르는 루니 립, 다니엘이 아기를 가지면서 알게 된 레타 등이 맺는 모든 관계가 각각 에피소드를 이룬다. 인물이 늘어나면서 서사가 확장하는 모습은 신화적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대지의 신 가이아로부터 신화 속 인물과 이야기가 늘어나듯 <안토니아스 라인>은 안토니아로부터 시작하여 인물이 연결되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 안토니아와 주변 인물이 모여 식사하는 장면.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다섯 차례 등장하는 식사 장면은 감독이 그려내는 연결의 상징이다. 이웃은 함께 식사를 하며 식구(食口)가 된다. ⓒ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갈무리

주변 인물들이 안토니아 집 마당에 모여 함께 식사하는 장면은 감독이 보여주려는 연결 이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런 식사 장면은 영화에서 다섯 번 등장한다. 안토니아와 다니엘, 바스와 그의 다섯 아들, 장의사이자 조산사인 올가 등 열 사람으로 시작한 식구는, 영화 중반부를 지나면서 서른 명 가까이 늘어난다. 식사 장면은 안토니아를 비롯한 인물들이 나이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순환’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식사 장면만이 아니다. 감독은 시퀀스 사이에 시간이 흘렀음을 알려주는 내레이션과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순환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영화가 그리는 순환은 사실적이다. 현실에서 삶은 긴장감을 쌓아가는 영화처럼 흐르지 않는다. 새로운 만남과 예상치 못한 사건이 개연성 없이 발생한다. 자연 역시 마찬가지다. 계절의 변화는 기승전결이 없다. 영화는 안토니아로부터 이어지는 4대를 자연과 연결한다. 그들이 대를 잇는 모습은 계절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영화가 사실적인 삶만 담는다면 지루할 수 있다. 신화적 서사가 이를 보완한다. 담담한 서사가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여기에 있다. 연결과 순환은 안토니아를 둘러싼 소소한 일상을 그리스 신화 같은 거대한 서사로 만든다.

▲ 아름답게 담아낸 자연과 일상의 장면은 <안토니아스 라인>이 가진 또 다른 매력이다. 영화는 시퀀스 사이에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배치해 자연과 삶 모두 순환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갈무리

지옥 같은 세상을 이겨내는 자유로운 영혼

<안토니아스 라인>에 나오는 인물도 영화의 서사만큼 자유롭다. 안토니아의 딸 다니엘이 대표적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다니엘은 미술학교에 간다. 아기를 갖고 싶지만, 남편은 필요 없다. 딸 테레사의 가정교사 라라에 첫눈에 반해 사랑을 나눈다. 주인공 안토니아도 마찬가지다. 안토니아는 남편이 필요 없다며 바스의 청혼을 거절하지만, 몇 년 뒤 바스에게 연인 관계를 제안한다. 테레사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자신이 원하는 음악과 수학 공부를 하면서 시몬 사이에서 아기를 낳는다.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자신이 필요한 일을 당당하게 상대에게 제안한다.

영화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유로운 삶의 기반이라고 말한다.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 모두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딸이 아닌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 개인으로 살아간다. 영화는 친오빠 피트에게 성폭행당한 뒤 안토니아와 함께 살게 된 디디를 상징적으로 그린다. 부모, 두 형제와 함께 살던 디디는 아버지 단과 피트로부터 희롱을 당하면서도 농장 일을 떠맡는다. 피드에게 성폭행을 당하던 디디는 다니엘의 도움으로 구출되고, 안토니아 집으로 들어간다. 이후 디디는 단의 딸, 피트의 동생이 아닌 ‘디디 자신’으로 살아간다. 루니 립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안토니아를 도우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디디도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처럼 삶의 주인이 된다.

자유로운 삶에는 늘 방해꾼이 있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종교가 자유를 방해하는 걸림돌이라 말한다. 다니엘이 결혼 없이 아기를 가졌을 때, 교회는 순결을 강조하며 다니엘을 비난한다. 신부는 강론에서 ‘지저분하고 경멸스러운 욕망’ ‘순결의 중요성’ ‘부끄럽게 이들이 여자’ 등이라 말하며 다니엘을 ‘저격’한다. 마을에서 가장 폭력적인 피트도 자유로운 삶의 적이다. 종교가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억압한다면, 피트는 물리적인 폭력을 동원한다. 영화 초반 자신의 여동생 디디를 성폭행하고 마을을 떠난 피트는 15년 만에 마을에 돌아와 어린 테레사를 성폭행한다. 영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드러낸다. 

“세상은 지옥이란다”

주인공 안토니아의 오랜 친구인 크룩 핑거는 골방에 틀어박혀 사는 염세주의자다. 그는 어린 테레사에게 “세상은 고통받는 영혼들과 악마들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냉엄한 현실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두 인간상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에 염세주의자 크룩 핑거는 자살을 택한다. 세상에서 도망가 죽음을 택한 그와 대비되는 인물은 안토니아다. 그는 세상과 맞서는 사람이다. 안토니아는 남편을 잃은 디디에게 “사는 거 별거 없다”며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격려한다.

▲ 언제나 강인했던 안토니아는 손녀 테레사가 성폭행당한 뒤 눈물을 흘린다. 안토니아도 크룩 핑거처럼 세상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안다. 고통스러운 세상에서도 안토니아는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고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삶을 이어간다. ⓒ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갈무리

삶을 대하는 두 태도는 영화 내내 반복된다. 안토니아는 세상 속에서 산다. 끊임없이 농사를 짓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반면 크룩 핑거는 영화 내내 골방에 틀어박혀 있다. 영화는 안토니아를 통해 세상을 회피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 밖으로 나서지 않으면 자유도 없다. 안토니아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가 원하는 삶을 이뤄가기 위해 노력한다. 다니엘, 테레사, 사라로 이어지는 혈연뿐 아니라,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식구를 얻은 건 모두 노력의 결과다. 식구들은 안토니아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함께 한다. 영화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그의 죽음을 크룩 핑거의 쓸쓸한 죽음과 대비한다.

삶과 죽음을 응시하는 태도

죽음은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마지막 적이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마지막은 죽음이다. 영화는 시몬의 어머니 레타의 죽음을 시작으로 루니 립, 크룩 핑거의 죽음을 차례로 보여준다. 세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영화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응시한다. 루니 립의 아내 디디뿐 아니라 안토니아와 그 주변 인물 모두 영화 장면 가운데 가장 슬픈 감정을 드러낸다. 영화는 “테레스가 점점 더 내향적이 되었고, 다니엘이 분노로 반응했다”는 내레이션으로 슬픔을 강조한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안토니아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다. 마지막 시퀀스, 남은 식구가 모인 식사 자리에서 안토니아는 바스와 함께 춤을 추고 자리로 돌아가 사라를 부른다. 안토니아는 사라를 방으로 데려가 자신이 당일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알린다. 뒤이어 “해가 뜨기도 전에 안토니아는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첫 번째 시퀀스에 나오는 첫 내레이션이다. 이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완성한다.

▲ 안토니아가 세상을 떠나는 영화 마지막 시퀀스에서 내레이션은 “그리고 증손녀인 나, 사라는 사랑하는 증조할머니의 임종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화자가 안토니아의 증손녀 사라였음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사라가 쓴 한 편의 서사시로 완성된다. ⓒ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갈무리

인간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 강인했던 안토니아 역시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 하지만 <안토니아스 라인>은 죽음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안토니아가 눈을 감고 디졸브된 검은 화면 위에 문구가 나타난다.

“이 긴 세월 동안의 경험으로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순환이라는 테마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주인공 안토니아는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다니엘과 테레사, 사라, 그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를, 삶을 이어나갈 것임을 강조한다.

페미니즘의 이상향을 그린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삶과 삶의 방식을 말하는 영화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맞닥뜨린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크룩 핑거처럼 ‘지옥 같은’ 세상을 회피하거나, 안토니아처럼 뚜벅뚜벅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개척하거나. 영화의 매력은 안토니아부터 이어지는 4대와 그 주변 인물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고, 상대와 무언가 하고 싶으면 제안한다. 각자 성격이 다르고 좋아하는 일도 다르지만 사는 방식은 같다.

이들이 가진 삶에 대한 태도는 상대를 대하는 태도로까지 이어진다.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를 비롯한 인물들은 각자 살아가는 방식에 ‘딴지’를 걸지 않는다. 남편 없이 가정을 꾸리든, 남편 없이 아기를 갖든, 같은 성별과 연인 관계가 되든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각자 판단해서 결정한 일이라는 사실을 존중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내 삶을 내 뜻대로 꾸려갈 자유가 있다면, 상대방에게도 그러한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 <안토니아스 라인>은 사랑에 관한 영화기도 하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다. 겉모습은 다양하지만 모든 사랑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갈무리

<안토니아스 라인>이 페미니즘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을 중심으로 서사를 진행하고, 남성이 적대자로 등장하는 건 부차적이다. 개인이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하며 삶을 이어가는 것, 그런 타인의 삶까지 존중하는 것.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이상향이다. 영화를 만난 지 2년이 지났지만 나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페미니즘을 어떻게 세상에 실현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26년 전 <안토니아스 라인>이 그린 이상향이 여전히 현실과 멀다는 사실이다.


편집: 김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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