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특강] ‘n번방 추적기’ 김완·오연서 한겨레 기자

2019년 말과 2020년 초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은 온라인에서 이뤄지던 성착취 범죄의 실상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최근 10년간 국내에서는 불법 촬영물 거래사이트 소라넷 폐쇄, 웹하드 카르텔(성범죄 영상 제공자와 파일 업로드 업체의 유착) 적발, 아동 성범죄물 거래소 웰컴투비디오의 주범 손정우 검거 등이 이어졌는데, n번방 사건은 더 심각한 ‘독버섯’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충격적인 성착취의 실태를 드러내고 징벌과 제도적 대응이 이뤄지도록 하는데 언론의 역할이 컸다. 대학생 기자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과 <한겨레> <국민일보> 등이 적극적인 보도로 사건을 공론화했고, 국회에서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되는 등의 성과를 끌어냈다. 그 중 첫 보도는 2019년 11월 <한겨레>의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연속기사였다. 해당 보도로 국제앰네스티 언론상 등 권위 있는 상을 휩쓴 김완(42), 오연서(30) 기자가 지난 15일 충북 제천시 세명대 학술관 201호에서 저널리즘스쿨대학원 특강에 나섰다. 
 
<한겨레> 탐사보도 역사에 한 획을 긋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저널리즘특강에서 탐사보도의 의미를 설명하는 <한겨레> 김완 기자. ⓒ 유재인

먼저 강단에 선 김 기자는 ‘텔레그램 성착취’ 기사가 <한겨레> 탐사보도에 한 획을 그었다며, 탐사보도의 의미부터 설명했다. 탐사보도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처럼 권력 감시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보도도 있고, 특정 사안에 관해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을 드러내는 심층 보도 형태도 있다. 김 기자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인터넷 발전으로 미디어 생태계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탐사보도가 각광을 받았다. 이 시기에 많은 언론이 ‘저널리즘의 미래가 탐사보도에 있다’고 보고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경제침체와 언론사의 수익구조 악화 등이 이어지면서 많은 인력과 시간, 비용을 들여야 하는 탐사보도는 현재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10년 언론전문지 <미디어스>에 입사해 편집장까지 지낸 후 2015년 <한겨레>로 이직한 김 기자는 어려운 언론 상황에서도 굵직한 탐사보도를 이어갔다. 2018년 <한겨레21>의 ‘20년차 촬영감독 월급통장에 상품권이 찍혔다’ 보도는 그가 특히 자부심을 갖는 기사다. 이 보도는 방송사들이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들에게 상품권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관행을 고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보도를 계기로 방송계에서 상품권 지급 관행은 사라졌고 힘없는 ‘을’의 처지에 있던 비정규직·프리랜서들의 삶이 다소나마 개선됐다. 그는 이 밖에도 ‘국정원 알파팀 보도’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 ‘자영업 약탈자들’ ‘김성태 딸 KT 특혜채용’ ‘삼성 지속불가능 보고서’ 등 굵직한 보도로 여러 언론상을 받으며 탐사보도 전문기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 ‘방송사 상품권 임금 지급’ ‘텔레그렘 성착취’ 등 <한겨레>의 대표적 탐사보도를 이끈 김완 기자의 강연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생들이 경청하고 있다. ⓒ 유재인

김 기자는 “모든 탐사보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자료와 데이터분석이 있어도 결국 사람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듣고 이를 담는 것이 탐사보도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는 “탐사팀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면서도 좋은 보도를 위해서는 탐사팀이 꼭 필요하다며 애정을 보였다. 

‘n번방으로 가는 길’ 너무 열려있어 충격 

이어 강연에 나선 오연서 기자는 ‘인천에 사는 고등학생이 텔레그램이라는 메신저에서 음란물을 팔고 있다’는 제보 이메일을 받은 것으로 ‘n번방’ 취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 내용의 사실관계를 확인해 기사로 내보내자 관련 제보가 이어졌다. 2018년 <한겨레>에 입사한 오 기자는 확인 취재를 하면서 ‘n번방’ ‘박사방’ 등 범죄 사이트로 연결되는 길이 생각보다 너무 열려있어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디시인사이드’ 등 공개 커뮤니티와 고교생들이 시험정보 등을 교환하는 사이트에서도 쉽게 연결이 됐다는 것이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닉네임 ‘갓갓(문형욱)’이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10~20대 여성에게 접근해 약점을 잡은 뒤 성착취물을 만들어낸 것에서 시작했다. 번호가 부여된 텔레그램방에 있던 여성들은 지인들에게 자신의 비밀이 유포될 것이란 두려움에 방 안의 가해자들이 요구하는 성적 행동을 해야 했다. 2019년 7월에는 n번방을 모방해 더 자극적인 성착취물을 공유하는 박사방이 등장했다. 박사방은 유료로 운영됐는데 '박사'라는 닉네임의 주범 조주빈과 공범 ‘이기야(이원호)’ ‘부따(강훈)’ 등은 n번방과 유사한 수법으로 피해 여성들을 모았고, 이들을 노예라 부르며 흉기로 몸에 표식을 새기게 하는 등 가학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 <한겨레>의 오연서 기자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특강에서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보도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 유재인

오 기자는 김 기자 등 선배들에게서 ‘피해자의 시선에서 기사를 써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회고했다. n번방에 들어가 취재한 기자가 바라본 ‘끔찍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관점에서 범죄를 설명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취재팀은 문장 하나, 단어 한 자를 쓰면서도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심지어 피해자에게 트라우마(충격적 경험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사에 사진을 한 장도 넣지 않았다. 

젠더데스크와 의견교환 과정에서 회의감도 

오 기자와 김 기자는 <한겨레>의 젠더데스크(성평등보도책임자)와 상의하는 과정에서 ‘너무 지나치게 주의하느라 사실성(리얼리티) 마저 잃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고 고백했다. 모든 기자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 자극적인 것, 충격적인 것을 앞세워 관심을 모으고 싶어하는데, ‘젠더감수성’에 맞추다 보니 사실마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 기자는 그러나 “적어도 성범죄 보도에서만큼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로 인해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고민해야 한다”며 “기사의 화제성과 피해자의 시선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9년 11월 25일부터 <한겨레>는 4회에 걸쳐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한동안 반향이 너무 없었다. 경찰 브리핑에서 관련 내용을 질문하는 언론사도, <한겨레>를 인용해 기사를 쓰는 언론사도 없었다. 피해자의 관점으로 조심스럽게 쓰느라 기사가 밋밋하게 보였던 탓이 있는 것 같다고 두 기자는 인정했다. 실제로 몇 주 후 <국민일보>가 사진까지 넣어 범죄 내용을 생생하게 보도하자 청와대에 수사촉구 국민청원이 몰리는 등 사회적 공분이 일었다.  

▲ 2019년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 <한겨레>에서 보도된 텔레그렘 n번방 관련 기사. ⓒ 오연서

성착취 피해자들을 어렵게 찾아내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촉하며 공들여 쓴 기사가 기대했던 반응을 얻지 못했을 때, 두 기자는 큰 상실감을 느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그러나 그런 순간까지 견디면서 다음 취재를 위해 힘을 내야 하는 게 탐사기자의 숙명이라고 덧붙였다. 

‘n번방 방지법’ ‘범죄조직 인정’ 등 값진 성과 

오 기자는 강의를 마무리하며 n번방 보도로 얻어낸 값진 성과를 정리했다. 우선 지난해 4월 국회에서 n번방 방지법(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과거에는 아동 대상 불법 촬영물 소지만 처벌했으나 이제는 모든 불법 촬영물이 처벌대상이 됐다. 

두 번째로 가해자들이 중벌을 받았다. 대법원은 지난 14일 텔레그램에서 박사방을 운영하며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조주빈에게 징역 42년의 실형을 확정했다. 오 기자는 “이전까지 디지털 성범죄에 몇 년 이상을 처벌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며 중벌을 통해 디지털 성범죄에 관해 사회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줬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중형의 배경에 n번방 가담자를 ‘범죄단체 조직원’으로 본 판단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 <한겨레> 등 언론의 보도로 텔레그램 성착취의 실상이 드러난 후 모든 불법촬영물 소지를 처벌하는 ‘n번방 금지법’이 통과됐고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을 포함한 여러 가해자가 중형을 선고받았다. ⓒ 오연서

‘음란물’ 대신 ‘성착취’ 개념 정립에 큰 의의

마지막으로 오 기자는 ‘성착취’라는 단어가 공식화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과거에는 디지털 성범죄에서 ‘음란물’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돼 ‘별것 아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한겨레>가 ‘성착취’라는 표현을 통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함으로써 공론장의 논의와 법률 문서에도 이 개념이 자리 잡게 됐다. 오 기자는 “사회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범죄에 대한 시각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어떤 변화보다도 중요한 저널리즘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오연서 기자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재인

강연에 이어 진행된 질의답변에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생 박성동(30) 씨는 “탐사보도는 큰 사안을 다뤄 초반에 방향을 잘 잡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김 기자는 “탐사보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설을 세우는 것”이라며 “취재 과정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확인될 경우, 가설을 기각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신문, 방송, 뉴미디어 등에서 탁월한 활동을 보이는 현직 언론인을 초청해 ‘저널리즘 특강’을 열고 있다. 초청 강사들은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과 함께 급변하는 미디어 지형과 언론의 대응, 언론인의 고민 등에 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수강생들의 질문에 답한다. <단비뉴스>는 강연과 문답 내용을 기사와 영상으로 독자들에게 배달한다. (편집자 주)

편집: 강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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