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제천역 앞 시락국

시래기는 눈과 비를 맞으며 얼고 녹기를 반복한다. 잘 손질해 보관해 뒀다가 푹 삶아 밥과 함께 볶아 참깨를 솔솔 뿌려 강된장과 비벼 먹는다. 자극적이지 않아 입에 넣자마자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수 있지만, 독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순하고 깔끔한 그 맛이 다시 떠오른다.

▲ 제천시락국은 제천역 바로 앞에 있다. 제천역전한마음시장과 마주하고 있어,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사람이 평소보다 붐빈다. © 김현주

80년을 한자리에 있는 건물

제천역에서 100미터(m) 남짓 떨어진 곳에 ‘제천시락국’이 있다.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남편 신은우(63) 씨는 홀 서빙을 맡아서 하고, 아내 윤영선(60) 씨는 주방 일을 주로 한다. 시락은 시래기의 경상도 방언이다. 시래기의 충청도 방언인 시라구도 아니고, 표준어인 시래깃국도 아니고, 시락국이라는 말을 상호에 쓴 이유가 궁금했다. 신은우 씨는 “저는 청주 사람이고 아내는 음성 사람인데, 시래기보다는 시락이라는 어감이 좋잖아요”라고 말했다. 

제천시락국은 2013년 12월 문을 열었다. 1978년부터 대한통운에서 일하던 신 씨가 2013년 퇴직하며, 사실상 창고로 방치돼 있던 대한통운 건물을 임대한 뒤 재단장해 제천시락국을 열었다. 윤영선 씨가 평소 집에서 해주던 시락국을 식구들이 좋아했다. 부부는 요리를 배우거나 요식업에 종사한 경험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주문을 받고 <식객> 작가 허영만 씨로부터 “지금껏 먹었던 시래기 요리와 차원이 다르다”고 평가받을 만큼 맛있는 음식을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 제천시락국은 지난해 1월 17일 방영된 TV조선 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소개됐다. 허영만 씨는 "유명 요리학교를 나왔다고 자랑 마라. 졸업장 없는 내륙의 촌부가 만들어낸 이 맛은 형식을 넘어선 감각이다"며 제천시락국의 음식을 극찬했다. © 김현주

매장이 있는 건물은 제천역이 개통되던 1941년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한강의 기적과 외환위기를 모두 겪었다. 6.25전쟁 때는 불이 나 지붕이 소실되기도 했다. 돌 가장자리를 다듬어 쌓아 올리는 전통 방식인 완자쌓기로 지어졌으며 화강석이 쓰였다. 

건물은 처음에 조선운수주식회사 제천지점 사무실로 쓰였다. 당시 조선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우리 자원을 가져가려고 중앙선을 착공하는 등 철도 건설 사업에 힘을 쏟고 있었다. 제천은 중부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조선운수주식회사 제천지점 사무실은 일본 수출을 위해 쌀을 모아서 보관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됐다. 1962년, 조선운수주식회사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후에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로 개칭)와 합병하면서 대한통운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1968년 대한통운주식회사가 민영화되고, 대한통운 제천영업소는 제천지역 시멘트 및 광물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통운 제천영업소는 2003년 등록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됐다. 등록문화재는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존과 활용을 위한 가치가 크다고 인정될 때 지정하는 것이다.

▲ 제천시락국이 있는 옛 대한통운 건물은 2003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됐다(위). 대한통운 제천영업소 시절 건물 모습(아래). © 김현주, 문화재청

느리고 강한 식재료, 시래기

제천시락국에는 두 가지 대표메뉴가 있다. 시래깃국과 하얀 공깃밥이 함께 나오는 ‘시래기국’. 그리고 강된장, 시래기밥, 시래깃국이 함께 나오는 ‘시래기밥’이다. 시래기밥이 8000원으로 시래기국보다 1000원 비싸지만 더 인기가 좋다. 시래기밥에는 직접 만든 강된장과 조선무로 담근 섞박지, 2년 동안 숙성한 장아찌가 같이 나온다. 참깻가루가 솔솔 올라가 있는 시래기밥을 강된장에 비벼 장아찌를 얹어 먹으면 일품이다. 음식이 기름지지 않아, 배부르게 먹어도 더부룩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는 시래기국이 주된 메뉴였는데, 2019년부터 시래기밥을 추가했다. 

“우리 식구(신은우 씨) 자랑이 아니라, 뭘 하나를 하면 아주 몇 년을 걸쳐서 준비해요. 시래깃국 하나만 해도 손이 모자랐는데, 밥을 한다고 그러기에 처음에는 못 하게 말렸죠. 근데 자기 딴에는 시래기밥 하는 식당 가서 먹어보고 그러면서 2년 정도 연구를 해본 것 같아. 그래 가지고 본인이 한다고 그러니까 해보라고 그랬는데, 지금은 완전히 시래기밥이 훨씬 더 많이 나가잖아요.”

시래기는 채소를 말린 것을 일컫는다. 보통은 무청이나 배춧잎을 말린 것을 말한다. 채소 맨 바깥쪽 껍질인 우거지와 혼동되어 쓰이곤 한다. 배춧잎을 말려 쓰면 배추시래기고, 무를 말리면 무시래기인데 보통 시래기라고 하면 무시래기를 칭한다.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김장철에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손질하기 때문에 무시래기가 많이 나온다. 우리 조상들은 겨울을 지내기 위해 시래기를 먹었다. 겨울에는 나물 같은 채소를 먹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시래기를 말려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먹으며 비타민D, 무기질, 식이섬유 등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했다. 정월대보름에는 겨울을 끝내고 봄을 맞이하며 오곡밥과 묵나물을 해 먹었는데, 묵나물에는 시래기가 꼭 들어갔다.

시래기는 강한 음식이다. 푸성귀가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완전히 말라야 시래기가 된다. 일교차가 커야 시래기가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맛있어진다. 최소 3번은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야 맛이 살아난다고 한다. 일교차가 20도 이상 벌어지는 강원도 양구 시래기가 유명한 이유다. 보통 농민들은 농사가 끝나는 10월 말쯤 시래기 건조작업을 시작하고 설날 전에 출하한다. 올해 11월쯤 작업을 한 시래기는 내년 여름이 돼야 먹을 수 있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로 겨울에도 온도가 많이 내려가지 않아 시래기를 맛있게 말리기가 어렵다고 한다. 신 씨 부부도 야외에서 시래기를 말리다가 최근에는 영하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냉동고를 샀다.

제천시락국에서는 단무지를 만들 때 쓰는 왜무의 무청을 사용해 시래기 요리를 한다. 왜무는 우리가 흔하게 먹는 조선무보다 당도가 높지만, 길이가 길어 수확이 어렵다. 단무지용 무를 재배하는 농장은 보통 단무지 공장과 계약재배를 한다. 그러면 쓸모없는 무청은 남겨진다. 제천시락국 주인 부부는 백운면 작목반을 통해, 단무지 공장에서 뿌리만 가져가고 남는 단무지 무청을 구한다. 단무지 무청은 다른 무에 비해 짧으면서 두꺼워서 식재료로 쓰기 좀 더 까다롭지만 깊은 맛이 난다고 한다.

▲ 제천시락국의 대표메뉴는 시래기밥과 시래깃국, 모둠 장아찌와 섞박지, 그리고 강된장이 한 번에 나오는 '시래기밥'이다. © 김현주

시래기는 원래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었다. 불과 30년쯤 전까지만 해도 시장에서 버려진 시래기를 주워 모아 시래기죽 같은 음식을 해 먹기도 했다. 우리 문학작품에서도 시래기 관련 표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정래 <태백산맥>에는 “잡곡밥에 시래기국, 김치가 고작이었다. 한 가지 반찬이 더 오르는 경우 동치미나 무말랭이무침 정도였다”며 가난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시래기가 등장했다. 우리말에는 시래기뭉치라는 표현이 있다. 얼굴이 못생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인데, 시래기뭉치라는 표현을 통해 시래기를 얼마나 낮잡아 봤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각종 영양소가 풍부해 항암작용도 뛰어나고, 변비나 다이어트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 됐다.

시래기밥과 함께 나오는 장아찌와 강된장도 일품이다. 모두 가게에서 직접 준비한다. 계절에 따라 최대 30여 종류의 장아찌를 담근다. 고추나 양파같이 비교적 흔한 장아찌를 포함해 곰취, 머위, 산미나리, 당귀, 돼지감자, 당근, 여주, 고구마 줄기 등 다른 곳에선 쉽게 접하기 힘든 장아찌도 맛볼 수 있다. 손님상에는 돼지감자, 여주, 무, 고추 등 4종류의 장아찌에 계절에 따라 5종류의 장아찌를 더해 9가지 장아찌가 섞인 모둠 장아찌가 올라간다. 

“(경북) 문경에 자주 가던 동네가 있었는데, 우리가 지금도 거기서 고추 같은 건 받아오거든요. 근데 거기가 화전민이 살던 터였어요. 화전민이 살던 터에 가면 나물 같은 게 좀 있어. 산미나리, 머위 이런 게 좀 많더라고. 그걸 가지고 처음에 장아찌를 담가서 사람들이랑 나눠 먹기도 하고 그랬죠.”

▲ 제천시락국 한쪽 벽에는 직접 담근 장아찌 중 일부가 진열돼 있다. 2년의 숙성 과정을 거친다. 계절에 따라 총 30여 가지 장아찌를 담근다. © 김현주

장아찌를 담그고 100일 이상 지나면, 효소액이 생성된다. 건더기는 장아찌로 사용하고 효소액은 자연 식초를 만들어 따로 팔거나, 민속주를 만들 때 쓴다. 민속주에 들어가는 효소액만을 따로 만들기도 하는데, 계절에 따라 다른 과일을 사용한다. 여름에는 수박이나 참외같이 시원하고 물기가 많은 과일 종류를 활용하고, 겨울에는 복숭아를 주로 쓴다. 막걸리와 효소액, 누룩을 일정 비율로 섞고, 구수한 맛을 더하기 위해 옥수수 튀긴 것을 함께 넣는다.

▲ 복숭아, 참외, 수박 등을 발효시킨 효소액을 이용해 만든 민속주. 과일 향이 나고 약간 시큼한 맛이 난다. © 김현주

강된장은 메주까지 직접 쒀서 만든다. 매년 3월쯤 메주를 쑤고, 그 메주로 된장을 만들어 2년 정도 숙성을 시킨 뒤 시래깃국과 강된장을 만들 때 이용한다. 강된장 주재료는 표고버섯과 양파다. 신 씨는 “올해 초에는 양파 값이 많이 오른다고 하기에, 더 오르기 전에 강된장을 많이 만들어뒀다”고 했다.

“나보고 천국 갈 거래”

초창기에는 주로 중년에서 노년 사이의 손님들이 가게를 찾았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보고 찾아왔다는 20~30대 손님들도 꽤 늘었다. 코레일 기관사들이 제천역에서 교대해서인지, 기관사들도 심심치 않게 온다. 신은우 씨는 “기관사들끼리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제천역 시락국집 맛있다고 올라가 있대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냐는 질문에 신 씨는 세종시에서 왔다던 부부 손님 이야기를 꺼냈다. 

“밥을 먹더니 우리보고 갑자기 천국에 갈 거래. 무슨 얘기냐고 그러니까.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이렇게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줘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줬다는 건 그만큼 착한 일을 했다 이거예요. 나중에 우리는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천국 갈 거라고 그래서 진짜 기분이 좋더라고.”

▲ 제천시락국을 운영하는 신은우 씨. © 김현주

신은우 씨는 이어 “우리가 제천을 빛내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라며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나라에 목숨 걸고 하는 것도 애국이지만 내 자리에서 내 일 열심히 하는 것도 애국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라고 덧붙였다.

겨울, 시래기가 어울리는 계절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며 가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제천도 낮과 밤 일교차가 거의 20도에 다다른다. 인생은 원래 외로운 거라고 하지만, 겨울은 더욱 외로운 계절이다. 따뜻한 시래깃국이 더 어울리는 시기다. 필요 없다고 버려지던 때도 있었지만 말없이 잠잠하게 추운 겨울을 버텨 자기 존재를 드러낸 시래기처럼 단단히 마음을 먹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묵묵한 이들을 보살펴야겠다.


편집: 현경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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