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김지윤 기자

초등학교 시절, 나비가 되고 싶은 애벌레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애벌레들 사이에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났다. 구름에 가려 꼭대기 끝이 보이지 않고, 정말 나비가 될 수 있는지도 불확실했지만, 애벌레들은 그저 열심히 기어 올라갔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한 애벌레는 이렇게 외쳤다. “야! 이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정상을 향한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더 빨리, 더 높이.’ 애벌레들은 구호를 외치며 더 많은 친구와 이웃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먼저 올라온 것에 대한 보상을 꿈꿨다. 자신들이 밟고 올라온 애벌레가 누구인지 잊은 채.

책 <꽃들에게 희망을>의 줄거리가 다시 생각난 건 능력주의에 관한 일련의 논쟁을 지켜보면서부터다.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지, 아니라면 능력주의보다 나은 대안이 있는지, 공정하다는 것은 무엇인지. 수많은 논의가 신문 지면과 포털을 가득 채우지만 결국 무한경쟁 시대에서 어떤 규칙을 설정할 것이냐는 이야기로 끝난다. 하지만 애초 정상에 오르면 나비가 될 수 있는지, 즉 ‘무한’경쟁의 시대가 옳은 것인지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4월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가 100만을 넘었다. 그중 16.8%가 20대였다. 한국의 자살률은 수십 년 동안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2위를 다투고 있다. 부정적인 수치들은 한국의 경쟁 사회가 개인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지 보여준다.

▲ OECD 국가 연령표준화 자살률. ⓒ KBS

능력주의에 따라 경쟁에서 실패하고 도태된 이들을 깔보아서도 낙인 찍어서도 안 된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환경‧인종‧성차별에는 반대하면서 저학력자에게는 편견을 가진다고 비판한다. 차별하는 이들을 차별함으로써 또 다른 차별을 낳는 것이다. 

한동안은 그런 무시와 차별로 정치적 올바름이 지켜지고 민주주의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그 관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포퓰리스트와 극단주의자가 결합해 민주주의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고 ‘트럼피즘’이란 현상이 생기며 반지성주의, 인종차별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경쟁과 세계화의 흐름에서 도태된 이들과 함께 가지 않으면 사회가 무너진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결국 경쟁의 규칙을 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다. 능력주의의 대안은 새로운 규칙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존엄성에 있다.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떤 이의 쓸모와 노동을 무시하면 안 된다.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실패를 했든 감싸 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회가 필요하다.

미국 금융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붕괴한 이들이 길 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 <노매드랜드>가 반면거울이 될 수 있다. 실패를 연민하지도, 도태를 깔보지도 않고 그저 연대하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지지하는 것. 그 속에서 인간 본연의 가치를 사회가 함께 되새겨보는 것. 거창한 능력보다 연대와 성찰이 필요한 시대이다. 


편집 : 최은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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