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추천 좋은 기사] 2018년 퓰리처상 해설 부문 수상작 – '장벽(The Wall)'

한 선거 유세 현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은 흰색 야구모자를 썼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슬로건은 2015년 7월, 텍사스 주 라레도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라레도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접경도시다. 유세 현장은 이민자들을 향한 분노로 가득했다. 그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든 가장 매력적인 말 중 하나는 장벽을 짓고 불법 이민자들을 내쫓겠다는 선언이었다.

▲ 2015년 7월 텍사스 주 라레도에서 연설하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문구가 흰색 야구모자에 새겨져 있다. ⓒ 연합뉴스

영국의 언론인 팀 마샬은 <장벽의 시대>에서, 미국의 건국 이념인 ‘여럿이 모여 하나(E pluribus unum)’는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흐려졌다고 했다. 분열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속화됐다. 테러, 빈부격차, 난민과 이민 문제와 같은 위협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자기 집단에 더 매달리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제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장벽은 안온한 사회를 보장하는 듯하다. 실재하지 않는 장벽이 미국 사회에서 강력하게 기능하는 이유다. 장벽은 정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을까. 2018년 퓰리처상 해설보도 부문(Explanatory Reporting)을 수상한 ‘장벽(The Wall)’은 이 물음에 답을 구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2017년에 재현된 애리조나 프로젝트

애리조나 주 피닉스는 역사적인 탐사보도 ‘애리조나 프로젝트’가 시작된 도시다. 1976년, 정치권과 마피아 간 부정부패를 취재하던 <애리조나 리퍼블릭> 기자 돈 볼스(Don Bolles)가 의문의 테러로 사망했다. 그는 같은 해에 미국탐사기자협회(IRE) 창립에 참여했다. 그가 죽은 후 미국탐사기자협회를 주축으로 미국 전역의 기자들이 스스로 모여 부패 구조를 파헤쳐 보도했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언론의 연대였다. 

‘장벽’이 ‘애리조나 프로젝트’를 재현했다. <애리조나 리퍼블릭>을 필두로 <USA투데이>의 모회사에 소속한 지역 매체 언론인들이 30명 넘게 모였다. 사진기자, 개발자, 디자이너, 프로듀서 등의 인력까지 합하면 거의 130명에 이른다. <USA투데이>는 1982년 출판회사 개닛이 최초로 창간한 미국 유일의 전국 일간지다. <애리조나 리퍼블릭>을 포함한 100여개의 지역 신문도 개닛의 소유다.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4개 주를 광범위하게 조사할 수 있었던 것은 <USA투데이>의 전국 언론인 네트워크가 있어 가능했다. 

<애리조나 리퍼블릭> 편집장 니콜 캐롤(Nicole Carroll)은 취재진과 함께 2016년 애리조나의 집회 현장에 있었다. 시민들이 벽을 세우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 국경을 본 적이 없다. 인근 도시의 생활도 알지 못한다. 취재진들은 그 구호가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을 포착했다. 니콜 캐롤이 주도하는 '장벽'에 관한 여정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국경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가장 생생한 기록

영미 언론에서 해설 보도는 복잡한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기사다. 미국 언론학자 마이클 셔드슨은 저서 <환영받지 못하는 언론은 왜 민주주의에 필요한가>(Why Democracies Need an Unlovable Press)에서 해설 저널리즘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자에게는]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안을 제대로 파악해서 대중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장벽'은 독자가 장벽의 실체를 알아가는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텍스트 기사로 국경에 걸친 삶을 발굴한다. 접경지대의 물리적 실체를 추적한다. 총동원한 기술로 제작한 인터랙티브 맵, 다큐멘터리, 팟캐스트, VR로 독자와 장벽에 동행한다.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한 장벽을 가장 생생하게 설명하기 위한 접근이다. 대다수의 미국 시민에게 장벽은 들어봤지만 보지는 못한 것이다. VR과 인터랙티브 맵은 장벽의 실체를 실감하게 한다. 기사와 다큐멘터리로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들은 접경지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취재해 나갔다. 약 2,000마일(약 3,288km)에 이르는 국경의 상공을 비행했다. 국경 전체를 운전해 횡단했다. 모든 울타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영상으로 기록했다. LiDAR, GPS, 매핑 등 모든 기술을 활용해 장벽의 실체를 VR과 인터랙티브 맵으로 구현해냈다. 접경지대의 실제 지형과, 그곳에 얽힌 사연들을 VR 시스템 안에서 바로 접할 수 있다. 

▲ '장벽' VR 인터페이스의 일부. 국경지대의 실제 지형과 울타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면 그곳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볼 수 있다. ⓒ Arizona Republic

팟캐스트는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독자와 취재진이 함께 있는 감각을 일으킨다. 기사와 다큐멘터리에서 보도된 내용 바깥의 것을 들을 수 있다. 기자가 취재하면서 직접 겪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직접 설명한다. 때로는 헬리콥터의 모터 소리, 사막을 걷는 건조한 발걸음 소리도 들린다. 퓰리처 심사위원회는 ‘장벽’에 관해 “텍스트, 비디오, 팟캐스트 및 가상 현실을 훌륭하게 결합한, 생생하고 시의적절한 보도”라고 평했다. 장벽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다른 보도와 차별화한 시도다.

장벽 이면의 현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국경에 장벽을 짓겠다고 했다. 그러나 국경은 선명히 그려진 선이 아니다. 특히 텍사스 주의 국경은 대부분 황야나 협곡, 강 한가운데를 가른다. 장벽의 실체에 다가서려면 국경(border)과 울타리(fence)를 구분해야 한다. 

▲ '장벽' 인터랙티브 맵. 국경과 울타리의 위치, 유형이 구분되어 있다. 국경의 어느 위치를 클릭하면 그 곳의 상공에서 촬영한 국경 영상을 볼 수 있다. ⓒ Arizona Republic

국경은 미국과 타국을 구분하는 명확히 정의된 선이다. 울타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임기 전부터 세워져 왔다. 울타리는 장벽의 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엄밀하게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그 장벽은 아니다. 2,000마일의 국경에 실제로 설치된 울타리는 650마일 뿐이고, 그 중 절반이 사람의 통행을 막을 수 없는 울타리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울타리는 높아졌다 낮아지고, 이어지고 끊어지다 이내 사라지고 만다. '장벽'은 인터랙티브 맵에서 국경과 울타리를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장벽'을 이끈 니콜 캐롤은 이미 2번이나 퓰리처상 결선까지 진출한 저널리스트다. 2013년 애리조나 주 야넬힐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20명의 소방대원 중 19명이 사망한 사건을 지리, 기후, 시스템 문제, 유족의 이야기로 신속히 풀어냈다. 속보임에도 다양한 시각을 풍부하게 드러낸 이 보도는 2014년에 퓰리처상 속보 부문 결선에 올랐다. ‘장벽’에 그의 강점이 고스란히 담겼다. '장벽'의 취재진은 국경 근방 토지의 지리적 특성과 경제적 환경, 법리, 역사를 함께 추적했다. 

'장벽'의 기사와 다큐멘터리는 국경지대에 삶을 걸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전한다. 목장주, 자경단, 인간 밀수꾼, 국경수비대, 미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마친 이민자, 국경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 유족의 이야기가 있다. 특히 다큐멘터리 'Deadly Desert' 에는 부패해가는 육신, 누렇게 바랜 유골, 제 색을 잃은 유품이 기록돼 있다. 죽음의 참상은 영상이 전달하는 이미지로 더욱 선연하게 다가온다. ‘장벽’ 취재팀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은 죽음까지 밝혀나갔다. 이를 위해 인권 단체, 주민들, 국경 자경단을 취재해 정보를 수집했다. 일련번호로만 기록된 죽음에게 이름을 되찾아 주고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장벽’은 애도를 독자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언론만의 방식으로 기록한다.

▲ 국경을 건너던 누군가의 물건이 사막에 버려져 있다. 미국 시민권자인 셀렌 라미레즈가 국경을 건너다 실종된 그의 형제를 수색하다 발견됐다. ⓒ Nick Oza/USA TODAY NETWORK

결론은 이렇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약속했던 장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벽을 건설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감내해야 하는 비용은 거대하지만 불법 이민과 범죄는 충분히 억제할 수 없다. 빈곤과 폭력에 고통받는 중남미 국민들은 죽음을 감수해서라도 국경을 넘을 것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이어질 것이다. '장벽'은 가장 생생한 기록을 통해 미국 사회, 나아가 이 세계가 마주해야 할 질문을 던진다.

저널리즘의 진화, 함께 가는 뉴스

2017년 전후, 언론계는 읽는 뉴스를 넘어 ‘그 곳에 가는’ 뉴스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스>와 <CNN>도 VR이나 360° 비디오를 활용해 실감형 콘텐츠를 제작했다. 2017년 3월 초 구글 뉴스랩은 나이트 재단(Knight Foundation)과 함께 ‘저널리즘의 360도 도전(Journalism 360° Challenge)’ 공모전을 시작했다. ‘장벽’은 퓰리처 해설보도 부문과 더불어 같은 해 7월에 이 공모전의 우승작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장벽'의 콘텐츠 에디터 조쉬 수송(Josh Susong)도 초기 단계부터 멀티 플랫폼에서의 스토리텔링을 염두에 두었다고 밝혔다. 핵심은 모든 스토리텔링 방식을 총동원해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장벽을 향한 막연한 희망, 혹은 분노만을 지닌 사람들에게 허구성과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쉽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언론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닌 진실의 검증자가 된다. '장벽'은 방대한 양의 스토리와 정보를 나열하지 않는다. 매체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장벽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세상에는 좋은 기사들이 있다. 저널리즘의 이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기사다. 언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도 여전히 언론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하는 기사이기도 하다. 기자는 그런 기사를 꿈꾸고, 독자는 그런 기사를 기다린다. <단비뉴스>는 2000년대 이후 국내외 주요 기자상 수상작을 중심으로 기자와 독자에게 두루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기사를 골라 소개한다. (편집자주)

편집 : 최은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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