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김훈 '칼의 노래'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비범한 영웅이 아니다. 휘몰아치는 두려움과 불안에 신음하지만, 죽음을 향해 담담히 한걸음 내딛는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그는 의병 김덕령처럼 모함으로 죽기도, 곽재우처럼 숨어 살기도 원치 않았다. 끝까지 전쟁터에 나서며 자신이 죽을 곳을 찾아다녔다. 그에게는 그 길이 자연사였다. 왜군이 쏜 화살로 죽음을 맞이할 때, 뒤돌아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선조의 질투, 부하들의 자책, 백성의 원성, 가족의 죽음이 평생 그를 휘감았다. 그는 휘몰아치는 파도 속으로 주저 없이 달려갔다.

비범한 영웅을 만난 적은 없지만, 온몸으로 세파에 부딪히며 살아온 한 평범한 인간이 내게는 영웅이다. 전북 완주군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고집불통 외할아버지다. 당신은 심술이 가득 차 있었다. 이웃이 건넨 따뜻한 말도 호통으로 맞받아쳤다. 옆집 감나무 가지가 담을 넘어왔을 때는 가지를 싹둑 잘라 버렸고, 할머니의 친구가 놀러 오는 날엔 마당에 온갖 농기계를 틀어 시끄럽게 했다. 외로운 삶은 매일 밤 술로 달랬다.

행여나 자식들이 오는 날은 밥상 옆에서 밤늦도록 설교했다. 가족들이 농사일 좀 그만하라 막아도, 고집이 어찌나 센지, 새벽같이 나갔다. “닭 잡아 줄까?”, “홍시 따다 줄까?” 손주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그들도 머리가 커지자 슬슬 할아버지를 피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도시로 옮기며 그를 떠났고 혹시나 불똥이 튈까 봐 시골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평생 당신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 전북 완주군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고집불통. 하지만 손주들에게만큼은 "닭 잡아 줄까?", "홍시 따다 줄까?" 한없이 너그러웠던 당신이었다. ⓒ 이성현

그 안방을 내 발로 직접 들어가게 된 건, 그가 허리를 다쳐 몸져누웠을 때다. 나는 입대 전 심란한 마음을 시골에서 달래고 있었다. 부모는 할아버지가 더는 농사짓지 못하도록 지켜보라 당부했다. 그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배추 농사는 할머니가 도맡아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미나리 농사만은 당신 손으로 기어코 하려 했다. 값 비싼 미나리를 마을 사람들이 탐낼 걸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미나리 농사에 따라 나섰다. 당신의 하루는 쉴 틈이 없었다. 새벽부터 미나리를 시장에 내다 팔고, 낮에는 농사일이 이어졌다. 저녁에는 수확한 작물을 손질하고 포장했다. 잠들기 전 농기구를 씻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난 평범한 당신의 이름도, 나이도, 과거도 몰랐다. 그저 안쓰러운 할아버지였다. 당신과 부대끼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갔다. 식혜를 나눠 마시고 싶어서, 앨범을 보고 싶어서, 그의 일기를 보고 싶어 안방에 드나들었다. 그는 내게 미나리 삼겹살과 약주를 건넸다. 처음으로 그의 술을 받아 마셨다. 술주정이 이어졌지만, 또렷하게 기억하는 한마디. “내가 악착같이 벌어서 5남매 다 대학 보냈지야...”

당신은 한국전쟁 때 홀로 남한으로 내려왔다 했다.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곧 따라간다 약속했지만,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다. 생전 처음 본 남쪽 작은아버지가 그를 머슴처럼 부리자 도망쳤다. 밥 한 끼 먹기 위해 군대에 ‘말뚝’을 박았지만, 배경도 힘도 없어 금방 쫓겨났다. 그래도 쉴 새 없이 공사판과 농사판에서 막노동하며 처자식을 먹였다. ‘한때는 이 마을에서 소문난 부자였다’고 히죽 웃는다. 너도나도 자신에게 돈을 빌렸단다. 이렇게 순진하니 사기를 당하지… 빚더미에 앉았다. 빚을 갚기 위해 최근까지 고된 삶을 그대로 맞받아왔다. 뭉개진 손톱과 발톱, 제대로 펴지지 않는 허리, 눈물을 머금고 있는 찌부러진 눈….

한 달 전 당신은 쓰러져 병원에 갔다. 대장암이었다. 항암치료를 받기 싫다며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세상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이제 당신은 안방보다 병실에 누워 있는 시간이 더 길다. 자식들은 더는 농사를 못 짓게 땅을 모두 팔아버렸지만, 당신은 여전히 농기구를 씻는다. 

▲ 당신은 마지막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눈을 감았다. 부서져 흙이 되어 가족의 거름이 되었다. 나는 그로 인해 꽃 피운다. ⓒ Pixabay

자신을 죽이려 하던 선조가 조선수군이 괴멸된 뒤 애걸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이순신은 전쟁을 내려놓고 싶었을 거다. 무능한 왕과 정치 밑에서 파도에 부딪힌 건 홀로 남은 민중이었다. 평범한 인간은 임진왜란 속에서, 광복과 남북전쟁 속에서, 부서져 흙이 되었다. 외할아버지도 가족의 거름이 되었다. 나는 그로 인해 꽃을 피운다.


편집 : 심미영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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