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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하는 문장, 르포르타주

기사승인 2021.08.31  2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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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훈 기자 domenico7@naver.com

- [마음을 흔든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 지음/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1만2000원

태양이 지구를 돌던 때가 있었다. 고대 철학이 세계를 정리한 이래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사람들은 땅에 눈을 두고 별의 운행을 헤아렸다. 믿음을 깨뜨리는 자들이 나타났다. 땅에 박은 고개를 들고 별을 좇았다. 그들은 지구를 중심에서 밀어냈다. 실로 움직이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대지라고 외쳤다. 코페르니쿠스는 세상이 지구를 향해 회전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을 퍼뜨렸다. 티코 브라헤는 맨눈으로 행성과 혜성의 궤도를 관측해 기록으로 남겼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자료를 밑천 삼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지구가 속한 궤도를 밝혀낸 바탕에는 ‘경험주의’ 정신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정립한 질서를 덮어놓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눈으로 본 사실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직접 감각한 내용만 확실한 지식으로 옮길 수 있다는 믿음을 나누었다.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진실에 다가가겠다는 열망을 그들은 오래 품었다. 그 불씨가 필부들의 말과 글에 옮겨 붙었다.

현실을 증언하는 르포르타주

있는 그대로 현실을 옮겨 세상에 전하려는 욕망은 언론의 뿌리였다. 그 소명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언론의 이상은 늘 감각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묘사하여 보도했을 때 정확한 현실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낯선 땅으로 기자를 보내 몸으로 인식한 현장을 전하게 했다. 일컬어 ‘르포르타주’(Reportage)라 불렀다.

프랑스어 르포르타주를 우리말로 옮기면 ‘보도’나 ‘보고’로 쓴다. 한국 언론을 둘러보면 ‘현장 르포’ 문패를 붙인 기사가 종종 보인다. 기자가 현장에 직접 갔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고 ‘르포’를 내건다. 두어 시간 현장을 둘러본 기자가 시민의 말을 인용하고 전문가 의견과 통계 자료를 보태는 식이다.

르포르타주는 칼로 자르듯 정의하기 어려운 장르다. 잘 구획된 영토라기보다 넓은 스펙트럼에 가깝다. 어떤 언어로 번역해도 결국 ‘보도’라는 뜻이니 이름만 놓고서는 장르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딱 잘라 말하지 못한다. 다만, 르포르타주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 오감을 동원하여 직접 목격한 현장을 전한다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구현한 르포르타주를 한국 언론에서는 좀체 찾기 힘들다. 

존 캐리라는 영국 문학비평가가 있다. 90년대에 여러 르포르타주를 모으고 엮어 선집을 냈다. 호주 공영 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르포르타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르포르타주를 이렇게 정의했다. “기자가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기사.”

오감으로 쓴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위건 부두로 가는 길> 표지. ⓒ 한겨레출판

“어떤 육체노동이든,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아마도 광부는 다른 누구보다 육체노동자의 전형일 것이다. 그것은 광부의 일이 더없이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듯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49쪽)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르포르타주의 전범이다. ‘레프트 북 클럽’이라는 독서 단체에서 노동 계급의 실업 실태를 다룬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1937년 펴냈다. 책은 2부로 나뉜다. 전반부에서 오웰의 기자로서 면모를 살핀다면 후반부에서는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오웰의 단면을 보여준다. 르포르타주에 해당하는 부분은 1부다. 당시 잉글랜드 북부 탄광 지대 노동자들의 생활 면면을 담았다. 갱도에 들어가서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허물어진 주택가를 찾아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기록했다. 꼼꼼한 취재와 섬세한 관찰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탄광 노동자들은 탄진에 가로막혀 흐릿한 빛을 겨우 뿜는 램프에 의지해 갱도 속을 기어 들어간다. 막장에 다다를 때까지 좁은 통로에 육체를 거듭 욱여넣는다. 팔과 다리가 땅에 육박하여 쪼그린 몸을 밀어내며 전진한다. 갱부들은 이 지난한 과정을 ‘여행’이라 부르며 자조했다. 광부들은 석탄을 무너뜨리고 쪼개어 컨베이어벨트에 실어 보낸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오웰은 썼다.

광부들은 벽이 갈라지고 물이 새는 집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살았다. 뜰에는 쓰레기와 빨래거리가 뒤섞였다. 석탄 가루 풀풀 날리는 골목을 잠시 산책하면 금세 검댕을 뒤집어썼다. 세 명이 겨우 들어갈 집에 여덟 식구가 서로 밀어내며 밥을 벌어먹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광부가 한밤이 되어 갱도로 떠나면 그제야 다른 식구가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 비참과 불행에 오웰은 연민과 동정을 보태지 않는다. 보고 들은 내용에 무엇도 덧붙이지 않았다.

오웰을 사로잡은 문제의식은 탄광 노동자들의 비극에만 머물지 않았다. 단순히 그들 고통을 사방에 전시해 최루성 기사를 쓰려는 목적은 없었다. 제목과 달리, 잉글랜드 북부에 위치한 위건에는 부두가 없다. 본래 목재 부두가 하나 있었는데, 위건이 탄광촌으로 바뀌며 허물어졌다. 오웰은 이제는 사라져서 찾을 수 없는 부두를 보러 위건에 간 것이 아니다. 탄광 지대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산업화가 남긴 이면을 통찰하려고 했다.

오웰은 1부 2장 첫머리에서 “우리 문명의 기반은 석탄”이라고 썼다. 우리가 중심이라 여겨 두 발 붙이고 살았던 지상을 지탱해주던 것은 실상 저 아래에서 석탄을 캐는 갱부들이었다.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던 문명은 궤도였으며, 그 길이 향하는 중심은 매일 석탄을 퍼 담는 지하의 광부들이었다. 오웰의 성찰은 탄진을 헤집고 나온 광부들의 창백한 얼굴 속에서 세계의 실체를 읽어내는 데 있었다.

“우리가 영국 북부에서 차를 몰고 가며 도로 밑 수백 미터 지하에서 광부들이 석탄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차를 모는 것은 그 광부들인 것이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48쪽)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저널리스트의 소명

‘레트레 율리시스 상’(Lettre Ulysses Award)은 2003년부터 탁월한 르포르타주를 선정해 상을 수여했다. 2006년까지 4년 동안 수상작을 발표했다. 재정을 보태줄 재단을 찾지 못해 2007년부터 시상을 멈췄다. 사이트만 남아 세계 르포르타주의 흔적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르포르타주라는 장르의 명맥은 끊어진 듯 보이나, 기자와 작가들이 쏟던 열정의 핵심은 이어지고 있다.

르포르타주, 더 보태면, 저널리즘의 소명은 현실을 재현하는 일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내용에 무엇도 덧붙이거나 덜어내지 않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산문에 이르러 르포르타주와 저널리즘의 목표는 넓어진다. 기성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제대로 감각할 수 있도록 오감을 문장에 옮기는 일이다.

르포르타주의 역할은 당신의 삶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데 있다. 그 일은 지구를 세계의 중심에서 밀어냈던 코페르니쿠스의 혁명과 닮았다.

100자평
오감으로 탄광 지대의 실체를 파헤친 르포르타주. 오웰의 신체기관을 옮긴 듯한 책. 다만 당시 영국 상황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통계가 쏟아지는 대목이 있으니 주의할 것.

편집 : 김대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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