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빈곤·차별 저항 인권운동연대 서창호 활동가

아프가니스탄 재건 과정에서 우리 정부를 도운 현지인들이 ‘미러클’ 작전으로 한국에 오자 환호가 쏟아졌지만, 난민과 이주민을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는 전반적으로 냉랭한 게 현실이다. ‘아프간 난민을 수용하자’고 제안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실에 욕설 전화가 쏟아진 것이 상징적인 사례다. 최근 대구에서는 지역 주민들 반대로 이슬람사원 건설공사가 중단됐다. 주민들은 이슬람사원이 들어서면 마을이 ‘슬럼(빈곤우범지역)화’하고 치안이 불안해진다며 막아섰다. 대구지역에서 인권운동을 해 온 서창호(48) 활동가는 이런 주민들을 상대로 ‘무슬림을 이웃으로 존중하자’고 설득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인 그를 지난 6월 4일 대구시 대현동 경북대학교 서문 부근 카페에서 만나고, 지난 26일 전화로 추가 인터뷰했다.

‘무슬림과 한국인이 더불어 사는 동네’ 만들기

▲ 대구 대현동 경북대 서문 부근 카페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는 서창호 활동가. ⓒ 최태현

“저는 행정과 인권이 같은 뜻이라고 생각해요. 행정은 시민의 행복과 권익을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요. 인권도 다르지 않아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자는 거예요. 인권 행정이라는 건, 인권이라는 기본 가치 속에서 행정이 구현돼야 한다는 거죠."

서 활동가는 대구 북구청이 지난 2월 대현동 이슬람사원 건설공사에 관해 공사중지 행정명령을 내린 것을 비판했다. 당시 인근 주민들은 이슬람사원이 완공될 경우 종교집회로 소음과 악취가 발생하고 치안이 불안해진다며 북구청에 탄원서를 냈다. 북구청은 건축주가 주민들과 합의해 민원을 해결할 때까지 공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대현동 주민들은 '이슬람사원 건립반대 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공사 재개를 막았다. 이들은 공사 현장 주변에 ‘이슬람 사원 건립으로 주민의 생존권·행복추구권이 박살난다’ 등의 현수막을 내걸고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 대구 경북대 인근인 대현동과 산격동의 골목 곳곳에 이슬람사원 건립에 반대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최태현

현재 대구경북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집행위원장도 맡고 있는 서 활동가는 경북대 민주화교수협의회측의 연락을 받고 이슬람사원 문제에 관여하게 됐다. 그는 파키스탄 등에서 대구지역으로 와 정착한 사업가, 연구자 등 이슬람사원 건축주 7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도울 방법을 고민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무슬림 유학생과 가족들이 사는 동네에 ‘이슬람 유학생도 더불어 사는 주민’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건 것이다. 그는 “안 그래도 인원이 적은 무슬림은 반대 현수막에 더 쉽게 기죽기 마련”이라며 “연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대구경북차별금지법제정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모여 북구청의 조속한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도 했다. 건축주 등 이슬람 이주민들은 시민단체가 자신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는 것을 고마워했다.

무슬림 학생의 호소 담긴 손편지 200여 통 배포

▲ 서창호 활동가 등 대구경북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이슬람사원 건축현장 부근에 내 건 현수막. 이슬람 이주민이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혐오와 차별 아닌 상호존중과 이해를’이라는 구호를 적었다. ⓒ 최태현

인터뷰 당일 서 활동가는 민교협 교수, 정의당원, 대구경북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 등 7명과 함께 대현동 일대 주민에게 200여 통의 편지를 전달했다.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무슬림 유학생과 그 자녀가 손으로 쓴 호소문이었다. “주민들의 불편을 이해하지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상호존중과 이해를 부탁드린다”는 부탁을 익숙하지 않은 글씨로 정성껏 쓴 편지였다. 이들은 2명씩 4팀으로 나눠 집집마다 우편함이나 대문 밑으로 편지를 넣었다. 서 활동가는 반대하는 주민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참가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서 활동가의 우려가 현실이 되기도 했다. 그가 공사현장을 지나던 무슬림 유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근처에 있던 주민들 사이에서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왔느냐”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6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은 “너거들 때문에 이 동네 자체가 이슬람 국가가 된다”며 “이렇게는 못 산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주민들이 더 몰려들자 서 활동가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현장을 떠났다.

▲ 경북대에 유학 중인 무슬림 학생과 가족이 대현동 주민들에게 쓴 편지. ⓒ 최태현

경쟁 사회에서 일어나는 혐오차별의 악순환

그는 북구청이 섣불리 공사중지 행정명령을 내린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정식 인허가를 거쳐 진행 중인 공사를 민원을 이유로 중지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서 활동가는 “교회나 절이 들어와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지 생각해보면 (판단이) 쉽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지난 6월 5일 무슬림단체인 '다룰이만경북이슬라믹센터'와 경북대민주화교수협의회 등 6개 시민단체는 북구청의 공사중지 행정명령을 집행정지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그리고 대구지법은 지난달 19일 공사중지 행정명령의 집행정지를 결정했다. 공사를 재개해도 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지만 주민들은 재판부에 진정을 내고, 공사 현장에 천막을 친 채 차량 진입을 막고 있다.

서 활동가는 주민들의 논리가 극우 기독교 단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지역이나 혐오세력은 있다”며 "이번 이슬람사원 문제도 일부 기독교단체가 결합하면서 혐오차별 문제로 번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이슬람사원이 지어져 이슬람국가가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격앙된 목소리로 기자에게 묻기도 했다. 서 활동가는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경쟁 사회에 살면서 상대방에 관한 이해나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어요. 항상 남을 이겨야 하고, 내가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 거죠. 그런 와중에 낯선 사람이 눈에 띄면, 쉽게 낙인을 찍어버리는 거죠. 특정한 방향으로 편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혐오차별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특히 나의 의견과 다른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분들이 극단적 단체의 주장을 흡입하면서 고정관념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어 더 안타까워요."

▲ 대구시 대현동의 이슬람사원 건축현장에서 무슬림 유학생이 인근 주민들에게 쓴 호소 편지를 들고 서 있는 서창호 활동가. 이 사원은 기초 골조공사가 중단된 채 반년 넘게 방치되어 있다. ⓒ 최태현

‘참교육 1세대’ 전교조 탄압 보며 사회에 눈 뜨다

"전교조 선생님이 폭압적으로 해직당하는 현실을 직접 보며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됐죠. 이른바 87년 체제가 들어서며 정치 체제는 민주화됐지만, 사회는 여전히 불평등하고 군사 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걸 '참교육'을 통해 배웠죠."

서창호 활동가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학생 1세대다. 1989년 대구 협성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문교부(현재 교육부)가 '촌지를 받지 않고' '학생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려는' 교사들이 모인 전교조를 불법화하면서 문학동아리 담당 선생님을 잃었다. 전국적으로 1500여 명의 교사가 해직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전교조 해직사태는 고등학생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90년 대구 경화여고에서는 전교조 지지 시위를 주도했던 김수경 양이 교사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다가 영남대의 한 건물에서 투신해 숨진 일도 있었다. 이런 기억이 서 활동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대구진보청년회' 활동을 시작했고 '민중정치연합'을 거쳐 '민주노동자의 집'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했다. 1998년 '민주노동자의 집'은 '대구노동교육협회'와 통합해 '노동자의 미래를 열어가는 현장연대'가 됐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에 집중했다. 2000년 한국통신(KT의 전신) 계약직 노조 투쟁을 지원하다 구속된 일도 있다. 2003년 ‘신용카드 대란’이 일어나자 빚더미에 깔린 서민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2005년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를 만들었다.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를 열어 금융피해자(신용불량자)들을 상담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2007년 <단 하루라도 빚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라는 책을 냈다.

▲ 서창호 활동가가 금융피해자를 지원하면서 목격한 이야기를 엮은 <단 하루라도 빚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표지. ⓒ 메이데이

서 활동가는 인권운동을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비주류의 외침과 투쟁이 사회 변화의 동력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러나 시민운동가의 수입은 적고, 활동 환경은 열악한 게 현실이다. 그는 시민들의 후원 외에 장애인 활동보조인으로 일하거나 인권강의 등으로 생계를 꾸리는데,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에 후원도 줄고 대면 강의도 줄어 어려움이 커졌다고 한다. 서 활동가는 “제가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마지막 세대면 좋겠다”며 “선배 세대로서 인권운동의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민이 인권단체를 후원하고, 더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미래가 오길 기대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편집 : 조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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