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여자전쟁

여자전쟁/수 로이드 로버츠 지음/심수미 옮김/클/2만원

▲ <여자전쟁> 표지 ⓒ 클

"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중략) 도대체 왜 전 세계 인구의 51%나 되는 여자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평등하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운동을 벌여야 하는가?"

영국 방송사 아이티엔(ITN)과 비비시(BBC)에서 30년간 기자로 살아온 수 로이드 로버츠(Sue Lloyd-Roberts)는 3번째 ‘10억 여성 궐기 대회(One Billion Women Rising rally)’가 열린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서 자문했다. 행사는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여성 폭력의 경각심을 일깨우자는 목표로 2012년부터 해마다 열렸다. 연사로 참여한 그는 연단 위에 서서 비에 흠뻑 젖는 것쯤은 두려워하지 않는 수백 명의 여자 관중과 우산 아래 움츠린 몇 안 되는 남자 관중을 보았다. 이들이 모인 이유가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수의 처음이자 마지막 저작인 <여자전쟁>은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됐다.

답 없는 문제’ 담당 특파원

수는 불의와 고통에 관심이 많았다.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1973년 ITN에 수습기자로 입사한 수는 여성 기자의 취재 영역이 왕실 행사나 박람회 등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을 바꾸려는 저널리즘과 인권’을 마음에 품고 있던 수는 여성 기자에게 허락된 기존의 경계를 넘어 구소련과 전 세계 험지를 작은 카메라와 함께 누비며 잠입취재와 위장취재에 성공했다.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총구를 향해 카메라를 드는 수의 대담함을 옥스퍼드대 친구이자 당시 BBC 보도국을 총괄지휘하던 토니 홀이 눈 여겨 봤다. 1922년 수는 ITN에서 BBC로 옮겼다. 그때부터 20여 년간 수는 에미상, 국제 엠네스티 언론상 등을 수상하며 BBC를 대표하는 저널리스트로 거듭났다. 

▲ 촬영 기자 없이 홀로 카메라를 들고 세계 곳곳으로 취재를 다니던 비디오 저널리스트 수 로이드 로버츠의 젊은 시절 모습 ⓒ BBC 웹페이지 갈무리

수는 감비아,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그리고 구소련의 여러 국가 등 부당한 폭력이 있는 곳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곳에는 고통받는 여성이 있었다. 성기 절제(할례), 인신매매, 강제결혼, 명예살인, 전쟁 강간 등 폭력의 피해자는 대개 여성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BBC의 ‘답 없는 문제’ 담당 특파원이라고 불렀다. 수는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풀지 못했던,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의 답을 찾고자 했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참담해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때 중요한 무기가 됐다. 관습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성기를 절제하는 할례(FGM·Female Genital Mutilation)의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감비아에 갔을 때의 일화다.

어느 이맘(이슬람 종교의 지도자)이 설교에서 FGM이 여성에게 이로운 일이라며 “할례할 때 잘라내는 것은 매우 가려운 부위인데 너무나 간지러워서 그걸 완화하려면 철수세미로 문질러야 할 정도예요. 할례를 하지 않은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날 때마다 옷이 잔뜩 젖을 정도로 축축한 분비물이 나와요”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여성은 수 혼자였다. 그는 분노를 담아 외쳤다. “나는 클리토리스를 가진 채 60년을 살았어요.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습니다.”

수가 불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전 세계 험지를 돌아다녔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여성혐오의 전 지구적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시리아 반정부 세력을 취재하기 위해 서구 언론인 가운데 최초로 시리아의 국경을 넘었다. 중국의 장기 매매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그가 중국을 떠난 뒤 중국 정부로부터 징역형이 내려졌지만 그 뒤로도 수차례 중국을 오갔다. 지난 2015년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수 대신 이 책의 원고를 마무리한 그의 딸이자 BBC 기자인 세라 모리스는 수가 험지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엄마가 주로 찾아갔던 국가들에서는 여성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현지 당국자들은 엄마가 자기들의 치부를 폭로할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의심조차 하지 못했어요."

하고픈 말이 많았던 캠페이닝 저널리스트

한국에서는 생소한 표현이지만 영국에서는 수를 ‘캠페이닝 저널리스트(campaigning journalist)’라고 부른다. 이 책을 번역한 JTBC 심수미 기자는 캠페이닝 저널리스트의 의미를 '자신만의 의제를 가진 활동가형 기자'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어느 사안에나 엄격한 공정성과 객관성을 요구받는 한국 기자의 입장에서 그의 담대하고 도발적인 취재물들은 경이롭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수에게는 습관적으로 반복돼온 폭력과 학대를 종식하고야 말겠다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비록 그녀 자신이 전적으로 젠더 이슈에 집중하는 여성 운동가라고 자평하지는 않았지만, 30여 년간 그의 카메라는 줄곧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영상물이 문제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해결에 이르기를 바랐다.

실제로 감비아, 이집트, 프랑스, 그리고 그가 사는 영국까지 4개국에 걸쳐 수년간 취재한 FGM 연속 보도물은 적어도 영국의 정책과 여론에 변화를 가져왔다. 2012년 수는 BBC <뉴스나이트>에서 할례 집행을 거부하고 감비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여성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이는 영국 방송 사상 처음으로 FGM 문제를 다룬 보도였다. 2013년이 되자 영국의 모든 매체가 FGM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 수는 FGM에 대해 수년 동안 연속 보도했다. 사진은 2014년 부르키나 파소에서 할례를 당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 BBC 웹페이지 갈무리

수는 지역사회에만 머물렀던 이슈를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문제로 확장했다. 해마다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유럽 대륙 안에서도 FGM이 일어나고 있는데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개별 집단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이를 방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2014년 영국 정부는 ‘소녀정상회담’을 열고 FGM, 강제결혼, 조혼 풍습을 종식시키기 위한 영국과 국제사회의 노력을 촉구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로 여겨지던 사안이 영국 내부의 문제, 심지어 국회에서 다뤄야 하는 의제로 설정됐다. 더디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변화는 천천히 확실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책의 4장인 ‘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 감옥’에는 전 세계에서 여자가 운전할 수 없는 유일한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자로 사는 어려움이 담겨 있다. 이 나라에는 여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도 없다. 운전기사가 없으면 남편이 일하러 간 사이에는 집을 나설 수조차 없다. 수의 보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조금씩 변화했다. 2015년에는 사우디 여성에게 처음으로 참정권이 허용됐고, 2018년에는 여성에게 운전이 허용됐다. 2019년엔 21세 이상 여성이 남성 없이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됐고, 불과 며칠 전인 7월 20일에는 남성 보호자 없이 여성이 혼자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지금도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을 기록하는 사람들

이 책의 목적은 단순히 방송기자로서 수의 업적을 기리는 데만 있지 않다. 책의 부제는 ‘잔혹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여성을 기록하다’이다. 핵심은 ‘싸우는 여성’과 ‘기록’이다. 수가 전 세계를 누비며 케케묵은 문제를 폭로하고 실질적인 변화로 이끌 수 있었던 건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풀기 위해 이미 싸우고 있던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수가 사우디아라비아에 갔을 때는 이미 그곳에서 3년 전부터 “여자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페미니스트 운동가 림 아사드가 있었다. 이집트에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독재를 끝내기 위한 ‘아랍의 봄’ 시위 진압 과정에서 자행된 군인들의 성폭행을 고발하고 군대와 싸우는 사미라 이브라힘이 있었다. 수는 그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멀리 크게 퍼지도록 기여했다.

마지막 장을 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수 대신 맺음말을 쓴 그의 동료는 “이 책의 진짜 맺음말을 쓰기란 불가능할 것”이라고 적었다. ‘잔혹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여성들’의 전쟁은 여전히 너무나 많은 전선에서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구 저편 뿐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그리고 싸우는 사람 곁에는 기자들이 있다.

2021년 1월 1일 00시 00분, 대한민국 형법에서는 '낙태죄'가 삭제됐다. 67년간 한국 여성들의 몸과 자기 결정권을 통제하고 억압하던 굴레가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 같은 시민단체와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줄곧 보도하며 임신중지 합법화 공론화를 이끈 수많은 언론이 함께 이룬 성과다. 

▲ 경향신문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낙태죄 폐지 서명이 올라온 2017년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낙태죄 존폐에 관해 지속적으로 보도해왔다. 경향신문 웹페이지에는 111건의 관련 기사가 시간순으로 나열돼 있다. ⓒ 경향신문 웹페이지 갈무리

지난해 취업준비생 신분이었던 ‘추적단 불꽃’은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고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을 추적했다. 국민일보와 한겨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건을 더욱 파고들어 세상에 알렸다. 그 결과 디지털 성범죄를 엄격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고 피해 지원이 확대되었으며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됐다.

일제의 참상을 고발하고 국제 여성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광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기지촌 미군 ‘위안부’ 피해자 등 억압과 폭력의 피해자들은 세기를 넘어 노쇠한 몸으로 사과와 배상을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다. 전투는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기자들이 있었다. 기자는 사회운동가가 아니지만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세상을 바꾼다. 

수는 이 책을 2016년 3월 사우스뱅크센터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맞춰 발간하기로 마음먹고 집필을 시작했는데 2015년 7월 말 줄기세포 이식수술을 받다가 사망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3년 뒤인 2019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됐으니 늦게나마 그의 뜻이 전해진 것 같다. 세상에 맞서 싸우는 여성, 그리고 그들을 기록하는 기자가 이뤄낸 변화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덧붙여 <여자전쟁>과 함께 보면 좋을 콘텐츠를 소개한다. 한국 언론은 젠더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인식이 있지만, 잘 살펴보면 젠더 문제를 꾸준히 보도하는 언론이 꽤 많다. 경향신문의 플랫, 한겨레의 슬랩, 그리고 한국일보 뉴스레터 허스토리 등은 젠더 균형을 갖춘 콘텐츠를 내놓고 있다. 

100자평
용감하게 맞서 싸우고 살아남은 여성들에 대한 르포르타주. 글맛은 조금 심심한 편. 그러나 사실과 진실은 다듬어진 문장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편집 : 유희태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