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KBS춘천 현충일 특집 다큐멘터리 '71년 전 그 소녀를 만나다'

송연순(89)과 정기숙(88)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얼마 뒤 열여덟 연순은 여자 의용군 2기생으로, 열일곱 기숙은 춘천여고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연순과 기숙은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과거를 숨겼다. 자녀들도 그들의 참전 사실을 2000년대에 들어서야 알았다. 그들은 왜 자랑스러운 과거를 숨겼을까? KBS 춘천의 현충일 특집 다큐멘터리 <연순, 기숙: 71년 전 그 소녀를 만나다>는 지난 50년 동안 그 사연을 꽁꽁 싸맨 이유를 풀어낸다. 

▲ <연순, 기숙>은 KBS 춘천에서 현충일 특집으로 방송한 다큐멘터리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여군의 이야기를 다룬다. 웨이브(wavve)에서 고화질 전체영상을 볼 수 있고, 유튜브에서도 30분 하이라이트 영상을 볼 수 있다. © KBS

내가 있던 곳, 전장

송연순(89)은 선생님을 꿈꿨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연순이 다시 학교에 간 이유였다. 학교에 갔더니 장교 두 명이 그를 불렀다. “나라를 위해서 여학생들도 나서야 한다”고 했다. 연순은 동기생들과 시험을 치르고 서울훈련소에 입소했다. 그곳에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군사기본훈련을 받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훈련은 17일 만에 끝났다. 연순은 6사단 사단장실에 배치됐다. 사단장이었던 장도영 전 국방부 장관은 연순을 보고 “아기가 왔다”고 했다. 죽음과 부상. ‘어린 연순’이 보기 참혹한 모습이 이어졌다. 연순은 1년간 전쟁의 민낯을 경험했다. 

▲ 노래를 잘했던 정기숙 씨는 정훈병으로 뽑혔다. 정훈 버스에 앉아서 점령지에 도착할 때마다 북한 시민들을 달래는 통일노래를 불렀다. © KBS

정기숙(88)은 노래를 잘했다. 성악가를 꿈꿨다. 춘천여자고등학교에 국군 장교가 찾아왔을 때 그녀가 뽑힌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6사단 정훈부에 편성돼 최전방 부대를 따라다니며 수복지구마다 찾아가 정훈 활동을 했다. 6사단의 진격로를 따라 압록강까지 따라갔다. 중공군이 평양까지 점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부대는 포위됐다. 헬리콥터가 정훈부 대장과 과장, 아나운서 두 명을 싣고 갔다. 헬리콥터는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다음 날 저녁 중공군이 습격했다. 기숙을 비롯한 네 명 학도병은 남쪽으로 향했다. 꽹과리, 나팔 소리와 함께 오는 총탄을 피해 숨어가며 남으로 향했다. 한 달 넘게 걸었다. 출발할 때 네 명은 도착할 때 두 명이 됐다. 

숨겨야 했던 내 이름, 군인

연순은 영어를 잘했다. 전역 후에는 사단장의 추천으로 미군 부대에서 구호활동을 했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연순에게 다가온 것은 지금의 남편이었다. 1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서 연순을 향한 우려를 쏟아냈다. ‘영어를 한다’ ‘군대를 다녀왔다’는 말은 ‘기가 센 여자’와 동의어였다. 연순은 오해를 받기 싫었다. “놀아난 것처럼 보일까” 싶어서 사단장과 찍은 사진, 전우와 찍은 사진을 싹 없앴다. 그 뒤로 연순은 평생 군대 갔다 온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송연순 씨는 71년 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8살의 나이였다. 영어를 잘했던 송 씨는 전역 후 미군 부대에서 통역을 하고 타자를 했다. 결혼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군 생활을 자랑스러워했다. © KBS

전쟁이 끝나고 전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연순과 전우들은 서로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연순은 전우 곽복순(89)이 보고 싶었다. 작은 키를 가진 연순과 달리 체격이 커서 언니처럼 연순을 돌봐 준 전우였다. 연순은 보훈청에 전우 찾기를 신청했다. 2015년까지 청주에 살다 세상을 떴다는 답이 왔다. 복순은 임종하기 한 달 전에 유공자가 됐다고 했다. 그의 아들과 딸은 유공자 지정 전까지도 어머니가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전역 장소도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복순 씨는 자식에게도 자신의 공적을 숨겼다. 다큐 속 연순은 복순을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다큐 속 기숙이 자녀들과 함께 찾아간 곳은 춘천여고에 있는 학도병 명비. 그곳에는 ‘정기숙’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기숙 이름 위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기숙과 함께 학도병 활동을 한 친구들이다. 그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기숙의 자녀도 어머니가 군인이었다는 소식을 40년이 지나서야 들었다. 기숙은 유공자 지정이 된 순간에도 참전 경험을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떨치기 힘든 경험이었고 친구를 잃은 아픔도 겪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오랜 세월에도 기숙을 놓아주지 않았다.

또 다른 연순, 기숙 

연순과 기숙은 자기 참전 경험을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다. 복순은 참전 사실이 공개돼 현충원에 묻혔지만,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들의 침묵은 세상의 편견 때문이었다. <연순, 기숙>을 취재한 KBS 오예진 PD는 ‘PD저널’에 쓴 칼럼에서 “그 당시 ‘여군’이라고 하면 ‘기가 센’ 여자, ‘발랑 까진’ 여자라는 편견과 더불어 군에서 성폭력을 당했을 거라는 인식이 강했다”는 연순의 말을 전한다. 참전용사라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여군을 사회가 어떻게 바라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마르쿠제는 비판의식 보다 주어진 목표만 달성하려는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라고 지적한다. 그런 사회에선 반드시 소외되는 존재가 발생한다. 열여덟 연순과 열일곱 기숙은 한국전쟁이 발발해 군에 일손이 모자라자 ‘국가를 위해’ 군에 자원했지만, 사회는 그들을 소외시켰다. 참전 군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는 것보다 가부장 사회 안에 도구로 포섭되는 게 당시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의 소외 논리에 맞춰 자신을 감추고 지냈다. 여군으로서 그들이 겪은 현실이다. 

▲ 여군 혐오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튜버의 댓글이다. 이 콘텐츠는 150만 조회 수를 달성했다. © 유튜브 채널 ‘노프로의 서민이야기’

연순과 기숙이 겪었던 ‘일차원적 사회’는 지금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여군 무용론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여성 혐오 유튜버는 여군에 대한 혐오 콘텐츠를 뿌리며 구독자를 모으고 있고, 여성 혐오에 편승하는 사람들은 그 콘텐츠에 달라붙어 스트레스를 푼다. 조회 수는 수십만을 넘나드는데 건전한 비판은 없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저급한 조롱뿐이다. 여군을 혐오하는 사회 현상이 지속하면 군에 자긍심을 갖지 못하는 연순과 기숙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군 내부도 문제이다.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은 ‘일차원적 사회’를 가진 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선임은 지인 개업 파티에까지 후임을 소집해 일을 시켰다. 그는 후임을 원하는 대로 불러서 쓸 수 있는 도구로 바라봤다. 지휘관은 자기 진급에 장애가 될까 싶어 가해자가 피해자를 찾아가 합의를 하도록 종용했다. ‘도구적 합리성’을 충분히 발휘한 결과였다. 지휘관은 수하를 진급용 관리대상으로만 바라봤다. 

▲ 공군 부사관 사망사건의 가해자 장모 중사가 지난달 2일 검찰에 구속돼 수사를 받았다. © KBS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상처를 입는 것은 언제나 피해자뿐이다. KBS 보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군사법원 1심 판결문에 적시된 강제추행 중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13%, 집행유예는 70%다. 2013년 화천에서 벌어진 오 대위 사건도 1심 집행유예이고, 2015년에 남성 군인이 술 마시고 20대 후배 여군에게 입을 맞춘 사건도 1심 집행유예였다. 어처구니없는 일의 반복에는 ‘도구적 합리성’을 방조하는 시스템이 있다. 

“아직도 우리는 숨어야 하는가?” 6월에 연순 기숙이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후대인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더 숨어 있어야 한다고 해야 할까? 군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져도 된다고, 바꿔 놓겠다고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 


편집 : 유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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