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나준영 한국영상기자협회장

20세기 초 유럽의 멀티미디어 작가 라즐로 모홀리-나기는 “미래의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제 누구나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쏟아낼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영상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왜곡되거나 조작된 영상과 이른바 ‘가짜 뉴스’가 개인의 인권과 사생활을 침해하고 사회 혼란을 부추기기도 한다. 나준영(52) 한국영상기자협회장은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영상취재·제작 기준을 만들고 널리 알리기 위해 뛰고 있다. 전국의 방송사 등에서 일하는 영상기자 회원 700여 명을 이끌고 있는 그를 지난달 25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 한국영상기자협회 사무실에서 만나고, 19일 전화로 추가 인터뷰했다.

생생한 현장 포착하되 대안도 담으려 노력 

“영상기자는 그 당시의 역사를 영상과 오디오로 상세히 기록하고, 다음 세대가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영상역사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지상파 방송사 영상기자 등 700여 회원을 이끌고 있는 나준영 한국영상기자협회장. ⓒ 나준영

나 회장은 1995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후 26년 동안 ‘최일선에서 일하는 현장기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뛰었다고 말했다. 글로 보도하는 취재기자는 현장에 꼭 있지 않더라도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취재원과 통화해서 기사를 쓸 수 있지만, 영상기자는 현장을 놓치면 끝이다. 그는 ‘좋은 영상보도’의 기준으로 “시청자에게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발전시켜야 하겠구나’하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보도”라고 말했다. 그는 또 “문제점을 고발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짜증만 유발하는 보도가 많다”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 회장은 좋은 영상보도의 예로 지난 1월 제96회 이달의 영상기자상 지역기획보도부문상을 받은 포항MBC 양재혁 기자의 다큐멘터리 ‘그 쇳물 쓰지 마라’를 꼽았다. 포항제철소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근 주민의 피해를 담은 작품이다. 그는 “주민 피해 등을 담기 위해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다양한 노력을 했고, 그것을 영상으로 잘 담은 작품”이라며 “이런 작품들을 보면 현장 영상기자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영상기자협회는 기자정신을 배양하고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이달의 영상기자상’과 ‘한국영상기자상’을 시상하는데, 심사기준이 꽤 엄격하다. 지난 3월 제97회 이달의 영상기자상은 7편의 응모작이 있었지만 수상작을 선정하지 않았다. 수상 가능성이 높은 작품에 ‘영상보도 가이드라인’을 준수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기자협회 가이드라인은 △자료 화면 표시를 하지 않거나 △외부 제공 영상을 사용하면서 제공자 표시를 누락한 경우 △초상권 보호가 미흡한 경우 △방역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경우 등 지양해야 할 사항을 꼼꼼하게 정해놓고 있다. 

▲ 한국영상기자협회에서 발간한 <영상보도가이드라인>. 영상을 취재·보도하는 기자들이 현장에서 마주치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영상보도의 기본원칙, 윤리, 취재원 보호 등 구체적 기준을 제시했다. ⓒ 한국영상기자협회

광주항쟁 침묵한 국내 언론, 반성과 연대 필요     

한국영상기자협회는 지난 3월 2일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오월 광주’에 비하며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미얀마 군부가 무고한 시민들에 총격을 가하는 등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것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협회는 또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국내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공백을 독일의 위르겐 힌츠페터 같은 외신기자들이 메꾸어 주었듯, 미얀마 민주항쟁에 대한민국 방송과 언론인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 회장은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그에 대한 저항을 다루는 보도를 보면서 1980년 5월 광주가 겹쳐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 당시 우리나라 언론이 언론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됐고, 이제는 대한민국의 언론인들이 나서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얀마에서 민주화 투쟁에 나선 시민들이 고립되고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와 외신기자 출입제한 등 핑계만 대다 보면 결국 그들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끝나버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 보도가 이루어져야 사람들의 관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나 회장은 미얀마 취재에 많은 제약이 있지만 현지 시민과 해직 기자들, 또는 유튜버들이 송출하고 있는 영상을 활용하는 방법과 국경지대에 가서 취재하는 방법 등 다양한 접근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광주항쟁 등을 통해 시민들 스스로 이룩한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국제적 연대와 도움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얀마에 관해 보도하고 지원함으로써, 국제적 연대를 이루고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회장은 이러한 국제보도와 연대에 관해 2000년대부터 고민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영상기자들은 1980년 5월 광주참상을 올바로 취재 보도하지 못한 것을 뼈아픈 경험으로 여겨 왔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의 언론사들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외신기자인 힌츠페터 씨의 보도가 국제사회의 반응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국내외 영상기자 대상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신설 

협회가 올해 <힌츠페터 국제보도상>을 제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협회는 ‘기로에 선 세계상’ ‘뉴스부문’ ‘특집부문’ 등 경쟁부문과 ‘오월 광주상’ 등 비경쟁부문에서 탁월한 국내외 기자를 선정, 각 1만 달러(약 1130만 원)를 시상하기로 했다. 전 세계 언론매체 소속, 혹은 프리랜서 영상기자를 대상으로 지난 1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응모를 받아 수상작을 선정하고 오는 10월 27일 시상식을 열 계획이다. 나 회장은 “광주항쟁에서 힌츠페터가 보여준 시대정신과 민주주의·인권·평화 등의 가치에 집중해서, 그런 가치를 담은 영상 보도들을 발굴하고 시상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 국내외 영상기자들을 대상으로 ‘힌츠페터 국제보도상’을 신설한 취지를 설명하는 나준영 한국영상기자협회장. ⓒ 김대호

협회는 이 상의 슬로건(구호)으로 ‘영상기자: 세상의 진실을 밝히는 눈'을 내걸었다. 나 회장은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도 영상기자는 그 현장의 한 가운데서 진실을 기록하고 알리려고 노력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써나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흔히 세계 3대 언론상으로 신문 분야의 퓰리처상(미국), 방송 분야의 피버디상(미국), 프리랜서 카메라기자를 대상으로 하는 로리펙상(영국)을 꼽는다. 나 회장은 “세계 3대 언론상이 미국·유럽 매체들과 언론인 중심이기 때문에, 비서구권에서 전 세계 보도를 상대로 심사하고 시상하는 새로운 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영상기자 지망한다면 ‘다양하게 찍고 공유해 볼 것’ 

나 회장은 다양한 매체가 범람하는 뉴미디어 시대에도 방송사에서 일하는 영상기자들의 가치와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레거시 미디어(신문·방송 등 전통언론)로서 뉴미디어보다 트렌드적인 면과 속보성에서 떨어질 수 있지만, 팩트체크(사실확인)하고 현장을 담아내려는 노력은 시청자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영상기자만의 경쟁력이자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나 회장은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서 공부하던 시절, 사회의 실태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영상기자에 관심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MBC 입사 후 2000년대 초반부터 협회 신문의 편집위원 등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협회 대외협력국장, 편집장 등을 거쳐 지난 1월 제27대 회장이 됐다. 이에 앞서 2006년 포토라인 운영 규칙 제정에 참여했고 2020년 협회가 발행한 ‘영상보도 가이드라인’ 집필에 참여하기도 했다.

▲ 지난달 25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 내 한국영상기자협회 사무실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는 나준영 회장. ⓒ 한국영상기자협회

그는 영상기자를 지망하는 청년들에게 “꿈이 있다면, 끝까지 도전하는 끈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한 후배의 사례를 소개했다. 후배는 영상기자를 지망했지만 공채 기회가 나지 않아 영어학원 강사로 취업했는데, 직장에 성공적으로 적응했지만 꿈을 접지 않았다. 그러다 MBC 공채가 나자 치열하게 준비해 결국 영상기자가 됐다고 한다.

나 회장은 지망생들에게 또 “내가 일상의 영상기자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영상을 촬영해 사람들과 공유하는 습관을 지니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엔 카메라가 없어도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영상을 찍을 수 있으니, 영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할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끝까지 도전한다면 결국 영상기자가 되어 현장을 누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입사전형과 관련, 그는 자신이 입사할 당시에는 카메라 촬영 실기를 보는 테스트가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 공채시험의 촬영 테스트가 실무능력과 상관없다는 의견이 대두하면서 없어졌다고 밝혔다. 나 회장은 “카메라는 취재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며 “공채에서 영상을 구성하고 영상서사를 만드는 능력을 가려내는 테스트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아래 영상은 나준영 회장 인터뷰 주요 발언


편집 : 김대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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