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인터뷰] CBS 씨리얼 박준형 PD

지난달 14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가설무대에서 열린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장애인과 활동가, 관객 등 3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준형(30) 프로듀서(PD)의 다큐멘터리 ‘너의 이웃이 되고 싶어’가 상영됐다. 발달장애인 시설에서 퇴소한 이원형(24) 씨를 주인공으로 한 영상이었다. 씨비에스(CBS)의 뉴미디어 채널 <씨리얼>에서 일하는 박 PD는 이어진 ‘감독과의 만남(GV)’ 시간에 관객의 질문을 받고 “원형 씨가 뮤지컬(지킬과 하이드)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을 부르며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한 장면을 담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박 PD는 장애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동료 팀원이 장애인 콘텐츠를 다룰 때도 제발 자신을 데려가 달라 부탁할 정도로 유별난 관심이었다. <씨리얼> 팀은 보통 1~2주에 하나의 콘텐츠를 제작하는데, 그는 자진해서 무려 8주 동안 원형 씨를 따라다닌 끝에 15분짜리 짧은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어떤 이유인지, 그리고 뉴미디어 PD의 고민은 무엇인지, 영화제 GV를 마친 박 PD와 혜화역 근처 <단비뉴스> 서울취재본부로 옮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16일 전화로 추가 인터뷰했다. 

장애인의 ‘주체적 삶’을 보여주고픈 PD

▲ 서울 대학로의 <단비뉴스> 서울취재본부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박준형 PD. ⓒ 최은솔

“장애인은 취미도 취향도 없이 획일화된 삶을 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탈시설을 하거나 이동권 운동을 하는 장애인들을 알아가면서 그들이 취향과 취미, 기호를 가진 다채로운 사람이란 걸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탈시설한 장애인의 주체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주체성’은 그가 장애인 등 소수자 콘텐츠를 다룰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다. 그는 그동안 미디어가 시혜적으로, 혹은 극복의 대명사로 장애인을 소비해왔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자폐증이 있는 ‘예승이 아빠’역의 류승룡은 온갖 폭행을 당하고도, 심지어 법정에서도 억울함을 얘기하지 못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시혜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반대로 영화 <말아톤>의 조승우는 자폐증을 마라톤으로 극복해낸 인물로 묘사됐다. 영화 속에서 장애는 ‘극복해야 할 상태’로 그려진 셈이다. 

박 PD의 다큐에서는 자폐증이 있는 원형 씨가 주체성을 갖고 자립하려는 모습이 부각된다. 원형 씨는 본인 명의로 집을 계약하고, 전입신고도 한다. 예산을 정해서 장을 보고, 직접 요리해서 밥도 먹고, 변기가 말썽을 부리면 직접 고친다. 모든 일을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원주택 코디네이터(관리자)가 중간 중간 와서 변기 고치는 요령을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박 PD는 장애인과 코디네이터 사이 역시 일방적인 의존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임을 부각한다. 코디네이터는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서비스 제공자이지, 무료봉사자가 아니다. 

▲ 박준형 PD가 만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원형 씨와 친구 석원 씨가 이사한 후 처음으로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하는 장면. ⓒ <씨리얼>

벽시계 2개를 나란히 건 취향과 개성 조명   

박 PD는 또 장애인들 저마다의 취향과 개성을 포착하는 데 공을 들인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획일화한 환경에서 각자의 미적 감각과 취향을 발휘하기 어렵지만, 탈시설 후에는 놀라운 개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들이 만든 집을 보면 되게 놀랍거든요. 비장애인의 취향보다 훨씬 더 개성 넘치고, 훨씬 더 고급스러운 부분들이 있어요. 한 장애인분의 집에 갔을 때는 벽에 시계가 두 개가 있어요. 보통 한 벽에 시계를 한 개 걸잖아요. 자기들은 이게 그냥 좋대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완전히 새로운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시설에서 획일화된 삶을 살고 있을 때는 그렇게 독특하고 그렇게 개성 넘치는 사람이 그냥 천편일률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이런 이들이 탈시설 하자마자 그들의 주체성을 발현하는 거예요.”

박 PD는 앞으로 ‘어릴 적 장애인 친구가 어른이 된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장애인 친구는 ‘특수반 도움반 아이’로 불리면서 ‘더럽다’ 놀림 받는 일도 있었다. 그들은 장애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수업을 비장애인 학생과 함께 듣기도 했다. 박 PD는 “나중에 <씨리얼> 콘텐츠로 그들이 어떤 모습이 되어있는지, 학교 다니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담아낼 구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장애인영화제 상영작 감독과의 질의응답 시간에 박준형 PD(앞줄 맨오른쪽)가 상영 소감을 말하고 있다. ⓒ 최은솔

이번 영화제에서 박 PD는 숙제도 하나 얻었다. 그는 “아까 상영회를 보면서 아차 싶었다”며  “<씨리얼> 콘텐츠는 수많은 장애인을 다뤘는데도 정작 시각, 청각 장애인이 볼 수 있는 장치가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소재로 한 영상을 만들면서도 정작 ‘관객’으로서 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애인영화제의 스크린에는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의 행동과 표정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는 ‘화면 해설’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이 함께 제공됐다. 그동안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 문제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호흡이 빠르고 흥미로운 방식의 편집을 추구해 온 그는 “어쩌면 군더더기로 느껴질 수 있는 시청각 해설조차 독자들이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게 하는 편집 능력과 기획력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중심주의와 싸우는 변화무쌍 콘텐츠 

박 PD와 <씨리얼>팀이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콘텐츠는 ‘서울중심주의’와 싸우는 것이다. 그는 “거대 미디어가 지역 청년의 주거, 취업에 무심하다”고 말했다. 박 PD 자신도 경북 포항에 있는 한동대 언론정보문화학부를 졸업했고 팀원 중 제주도 출신도 있기에 지역 격차에 관한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영상으로 이어졌다. 

지난달에 나온 영상 중 경남 진주의 취업준비생이 서울에서 10분 정도 면접을 보려고 4시간을 들여 서울로 가는 여정을 그린 것이 대표적이다. 영상에는 취업준비생이 짐을 꾸려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는 과정, 면접을 보고 결과적으로 떨어진 것을 확인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유튜브 댓글에는 “면접장에서 서울과 타 지역 사이 인프라 차이를 공감 못 하시던 분들이 생각나는데, 세상엔 자기가 겪어보지 못한 많은 일과 상황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등 공감 의견이 많이 달렸다. 박 PD는 이런 청년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전달하려 하는 것, 청년 문제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있게 다루는 것이 <씨리얼>과 자신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 경남 진주시에서 서울로 면접을 보러 간 취업준비생의 하루를 다룬 영상의 주인공. ⓒ <씨리얼>

박 PD와 <씨리얼>팀은 또 ‘카멜레온’이라고 불릴 만큼 매번 새로운 제작 방식을 추구한다. 박 PD는 시각적인 상징을 즐겨 쓰는데,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를 ‘젠가’ 게임의 블록으로 묘사하는 식이다. 노동자가 안전하지 못한 회사는 젠가 블록처럼 언젠가 무너진다는 상징을 담았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공의 무게감으로 설명했다. 가해자 상사는 무거운 당구공으로, 피해자 탁구공은 작고 쉽게 찌그러지는 탁구공으로 비유해 직관적인 이해를 도왔다. 박 PD는 “학부생 시절 연극 수업에서 배웠던 상징을 자주 쓰게 된다”고 말했다. 시각적 상징 기법은 많은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도 흥미로운 영상을 만들 수 있는 ‘가성비 제작’이기도 하다. 찰흙을 이용해 투표제도를 풀어 설명하는 팀원도 있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저희 채널은 콘텐츠가 다 다르거든요. 형식도 다르고, 정해진 규격이 하나도 없어요. 이슈마다 새로운 형식과 편집과 기획으로 다 새롭게 만들거든요. 어떨 때는 실험 카메라처럼, 어떨 때는 콩트처럼, 뮤직비디오처럼, 지금은 아트 필름처럼 찍으려는 것도 있어요. 또 인터뷰도 있고, (칠판에 모형을 붙여서) 손으로 설명하는 것도 있고, 이렇게 계속 변하는 채널 같아요.”

▲ 박준형 PD가 즐겨 쓰는 시각적 상징 기법. 왼쪽은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를 ‘젠가’ 블록으로, 오른쪽은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를 크기와 무게가 다른 공으로 상징한 모습이다. ⓒ <씨리얼>

영화감독 꿈 접고 사회성 짙은 ‘스토리텔러’로  

박 PD는 대학시절 내내 영화감독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영화 <자살클럽>의 일본 감독 소노 시온처럼 자신만의 강렬한 색깔을 가진 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그러다 <닷페이스>와 <씨리얼>을 보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 

“저는 소수자 문제도, 우리 사회가 이렇게 계급적인지도 몰랐고, 이 세계에 이렇게 많은 정체성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페미니즘도 몰랐어요. 여성인권 정도로만 생각했던 거죠.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얼마나 필요한지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그 콘텐츠들을 보면서 완전 빨간약(세계관을 바꾸는 물질)을 먹은 거죠.”

유튜브 채널 <닷페이스>와 <씨리얼> 모두 장애인, 성 소수자, 이주민, 폭력 피해자 등 현실에서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그는 조금이나마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때마침 나온 뉴미디어 PD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2018년 6월 당시 논란이 됐던 제주 예멘 난민 문제에 관해 콘텐츠 기획안을 쓰고 대학 때 찍었던 영화를 함께 제출했다. 그해 9월 <씨리얼> 팀원으로 합류했다. 

▲ 영화감독의 꿈을 접고 뉴미디어 PD가 된 과정을 이야기하는 박준형 PD. ⓒ 최은솔

그는 뉴미디어 PD가 독보적인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야기에 자기만의 색깔이 묻어난다면 그것을 영화로, 유튜브로, 음악으로, 미술로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다. 멀티미디어 역량도 중요하다. 박 PD는 “사실 처음에는 촬영도, 편집도 잘 못할 수 있다”며 “하지만 이 모든 분야를 계속 향상시켜 나갈 수 있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일 것 같다”고 말했다. 15분 내외 유튜브 콘텐츠를 어떻게 하면 더 새롭게 만들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는 그는 “언젠가 한 대상을 2~3년 정도 따라다니며 깊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예정”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편집 : 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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