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스마트폰 꺼내서 카메라 켜보세요. 이제 열사와 대화가 시작됩니다.”

지난 2일 <단비뉴스> 지역농촌취재팀이 찾은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이곳은 민주화의 연대를 짚어보며 관람할 수 있는 ‘역사기념관’이다. 안내를 맡은 하수봉 연구사는 제1전시관 입구에서 휴대폰을 통해 벽면을 보라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스마트폰 화면에 웃는 얼굴과 함께 수많은 민주열사 모습이 나타난다. 좌∙우측에는 열사가 꿈꿨을 역동적이고 활기찬 민주세상을 표현한 벽면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하 연구사는 “여기서 열사들과 첫 만남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소개한 뒤 민중예술공간으로 안내했다.

▲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제1전시관 입구. 1960년대부터 1997년까지 민주화 현장에 있던 사람들 사진 3천여 장으로 얼굴을 형상화했는데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웃는 얼굴이 휴대폰 카메라에는 나타난다. ⓒ 박성준
▲ 취재진이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제1전시관 앞에서 김동민 소장(오른쪽 세번째)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 오동욱

안쪽 공간에는 문학과 미술, 가요 등 각종 예술품이 전시돼 있다. 한쪽에는 나무 모양 구조물이 눈에 띈다. 나무에는 방문객들의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하 연구사는 “열사들의 희생정신을 자양분으로 자라나는 나무”라며 “이것이 민주공원의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이 나무를 통해 열사와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포스트잇에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내용들이 적혀 있다. 하 연구사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과 통일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귀띔했다.

잊힌 91년 5월 투쟁

“91년 5월 투쟁 들어보셨나요? 가장 중요했는데도 잊힌 거죠. 잊어버리면 다시 배우고 알아가면 되는데 더 큰 문제는 아예 축소돼 버렸다는 거예요. 그냥 ‘91년 5월에 무슨 일이 있었다, 투쟁을 했다’ 이런 기억만 남아 있는 건데 벌써 30주년이 됐단 말이죠. 아직 이름조차 없어요. 민중운동으로 부를지, 민주항쟁 또는 민주투쟁이라고 부를지 제대로 논의도 안 되고 있어요.”

▲ 강경대 열사가 생전에 사용하던 시계와 신발. 하수봉 연구사는 “유족들이 도움을 주셔서 최근에 전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 박성준

그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열사들의 유서와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첫 번째로 강경대 열사의 시계와 신발이 눈에 띄었다. 강경대 열사는 1991년 4월 26일 시위를 벌이던 중 백골단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해 사망했다. 강경대 사망사건은 1991년 5월 투쟁의 도화선이 됐다. 강경대 열사 죽음과 동시에 투쟁의지에 불을 붙인 것은 박승희 열사다. 91년 5월 투쟁에서 사망한 박승희 열사는 목포 출신인데,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전교조 지킴이’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전교조와 노동운동

하수봉 연구사는 91년 5월 투쟁이 발생하게 된 데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다고 해석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활동과 생존권 투쟁이다. 하 연구사는 “당시에는 큰 문화충격이었다”며 고등학교 시절 전교조 교사를 회상했다. 폭력으로 학생을 제압하던 교사들과 달리 학생을 존중하는 새로운 교사의 등장으로 학생들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때 받은 교육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학생들이 깨달은 것 같다”며 “그런 인식을 갖고 대학에 간 학생들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 열사의 사진과 유품 등이 소개돼 있는 전시관의 모습. ⓒ 박성준

당시 ‘생존권’이란 것은 10만원쯤 되는 수당이었다. 하 연구사는 “지금 10만원은 작아 보일 수 있지만 1990년에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며 “심각한 착취와 열사들의 죽음에 기인한 분노가 투쟁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택시기사로 일하던 석광수 열사는 사업주의 무책임한 임금협상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몸에 불을 질렀다. 석광수 열사가 분신한 뒤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희생이 모여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6월에 서서, 5월을 망각한 이유

1991년 5월 투쟁은 왜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을까?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의 하수봉 학예연구사는 두 요인을 지적했다. 국가권력을 이용한 조작과 탄압, 그리고 언론의 조작과 왜곡이다. 전시장에는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이 국가권력을 이용한 조작과 탄압의 사례로 전시돼 있다. 유서대필조작사건은 1991년 5월 8일 전국민주민족연합 김기설 사회부장이 노태우 정권에 항의해 유서를 남긴 채 분신자살한 것을 두고 검찰이 김기설과 같이 활동한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을 유서 대필과 자살 방조 혐의로 처벌한 사건이다.

기념공원 전시장에는 유서대필조작사건의 기록이 연표로 전시돼 있다. 연표에 따르면, 강기훈 씨는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받기까지 23년, 검찰에게 공식 사과를 받기까지 28년 걸렸다. 연표의 끝은 아직도 매듭이 지어지지 못했다. 2015년 5월 14일 강 씨는 대법원 판결로 무죄가 확정됐으나, 민사소송을 진행하며 암에 걸린 지금도 국가 공권력에 저항하고 있다. 하 연구사는 “국가권력에 의한 기억 조작과 탄압을 겪으면 자기 인생뿐 아니라 가족의 삶도 바뀐다”며 강 씨가 겪은 고통스러운 세월을 지적했다.

▲ 왼쪽은 1991년 4월 29일 <조선일보> 기사로 강경대 열사를 죽인 ‘쇠파이프’ 전경을 전면에 내세웠다. 오른쪽은 같은 해 5월 26일 <조선> 사진기사로 ‘시위대 50여명이 쇠파이프를 들고 출입자를 통제하고 있다’는 설명을 달았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전시장 안 유서대필조작사건 연표가 끝나는 곳에 한국외국어대에서 벌어진 정원식 총리 계란 투척 사건을 다룬 신문보도가 붙어있다. 91년 5월 투쟁이 잊힌 또 다른 요인은 언론의 조작과 왜곡이다. 언론의 조작은 공권력의 조작보다 교묘했다. 하 연구사는 <조선일보>의 ‘쇠파이프’ 프레임을 들어, 언론의 조작과 왜곡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설명한다.

하 연구사에 따르면, 쇠파이프는 시기별로 다른 프레임으로 쓰였다. 1991년 4월 26일 강경대가 백골단에게 살해당하자, ‘쇠파이프를 든 백골단’처럼 폭력 이미지를 만들고, 개인 일탈을 강조해 정권의 책임을 희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반면, 같은 해 6월쯤에는 시위대가 들고 있는 ‘쇠파이프’에 초점을 맞추고, 쇠파이프가 가진 폭력 이미지를 학생에게 넘겼다. 하 연구사는 “시위대에게 폭력 이미지를 넘기면서, 학생들이 전하려던 메시지는 다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하 연구사는 외대 정원식 총리서리 계란 투척사건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보통 갈등이 생기면 상대편 이야기도 실어주잖아요? 이 사건에서 학생들 반론은 없습니다. 가해당한 정원식 총리 이야기밖에 없어요. 정 총리는 문교부장관을 하면서 (전교조에 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해직을 단행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정 총리는) 스승들을 쫓아낸 정치인인 거예요. 그 얘기는 <한겨레> 빼고 거의 보도하지 않았어요. 지금 91년 5월이 여러분들 기억 속에 없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의도적으로 기억하기 싫어서예요.”

1991년 5월은 6월 민주항쟁이 남긴 숙제를 풀던 시기다. 국가권력은 민주화했지만, 민중의 삶은 독재 시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5월 투쟁이 계속된 60여일은 인권과 생존권 보장을 위해 싸운 시간이었다. 하 연구사는 민주화 운동을 볼 때는 “성공과 실패보다 운동이 일어났던 배경과 지키려 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란 이름의 의미

1층으로 올라가면 제2전시실이 있다. ‘역사/공감’이 주제다. 높은 천정 넓은 공간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벽면을 빙 둘러 있는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통사표’다. 1945년부터 김영삼 정부까지 정리돼 있는 통사표의 구성은 일반적이지 않다. 대개 시선 높이에 한국의 주요사건을 놓는데, 제2전시실의 시선 높이에는 민주화 운동사가 위로부터 언론운동, 노동운동, 청년∙학생운동 순으로 나뉘어 있다. 각 구획은 글과 사진, 영상으로 각 운동의 흐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구성했다.

▲ 1층 제2전시실에는 벽면 가득 민주화 운동 통사표가 붙어있다. 검은색 연도 표시 위로 민주화운동사가 적혀 있고, 연도 표시 아래로 한국의 주요사건들이 정리돼 있다. © 김태형

당시 희생된 민주열사 이름은 통사표에 노랗게 칠해져 있다. 통사표에 1987년 6월보다 1991년 5월에 노란 이름이 더 많다. 그 이름 앞에서 6월 항쟁이 성공하고, 91년 5월 항쟁이 실패했다는 말이 무의미하게 보였다. 통사표 위에 한국의 노동, 언론, 청년과 학생 운동은 1945년부터 쭉 이어진다. 고문추방운동, 참교육운동 등 끊임없는 도전이 적혀 있다. 성공한 운동보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운동이 더 많다. 하 연구사는 “도전과 실패의 역사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보면, 그들이 무슨 가치를 어떻게 달성했는지 이해된다”고 말했다.

“역사 속에서 보면 91년 5월은 87년 6월과 떨어질 수 없어요. 그리고 87년 6월은 85년과 떨어질 수 없고. 왜냐하면 같은 주제로 계속 끊임없는 도전과 끊임없는 실패가 반복됐거든요. 그 속에 끊임없는 발전이 있어요. 이걸 모르면 마치 한번에 모든 걸 해결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오류가 많이 발생해요. 피는 그 순간 흘리게 됩니다.”

민주화 역사로 배우는 인권

“여기부터는 이제 광장의 민주주의가 시작됩니다.”

바리케이드를 지나면 ‘테마별 민주화 역사 공감’ 전시 공간이 나온다. 91년 5월 대학가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 미니어처가 먼저 눈에 띈다. 시위 학생들이 백골단과 대치하고 있다. 무장한 백골단 사이에는 당시 실제 사용된 ‘페퍼포그차’가 서있다. 페퍼포그 최루탄을 실은 장갑차로, 탄압의 상징물이다. 최루탄이 발사되고 학생들이 흩어져 도망가면 백골단이 그 뒤를 쫓아가 마구 구타하며 시위를 진압했다. 1990년 발표된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은 범죄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까지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하 연구사는 “투쟁 현장에서 친구였던 두 사람이 상대편으로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며 “그런 의미에서 페퍼포그는 시대의 아픔을 대표하는 산물”이라고 말했다.

▲ 대학생 시위대와 백골단이 대치하는 대학가를 재현했다. 학생들은 ‘민주세력 총단결로 군사독재 물리치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김태형

91년 5월 대학가를 지나면 육칠십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 다락방을 재현한 공간이 나온다. 평화시장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하며 노동현실을 고발한 곳이다. 다락방 1층에서 여공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미싱을 돌리고, 2층에서는 노동자가 엎드린 채 다림질을 하고 있다. 꽉 막힌 공간은 섬유에서 나온 먼지로 가득해 폐병에 걸리는 사람도 많았다. 바로 옆에서는 미싱 바늘에 손을 다쳐 피를 흘리는 여공이 상급자에게 혼나고 있다. 하 연구사는 “치료는 안 해주고 오히려 졸았다고 구박하는 상황”이라며 “당시 저 친구들이 10대였다”고 설명했다.

▲ 하 연구사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 다락방 앞에서 취재진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 김태형

“이런 공간을 전시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굉장한 진전입니다. 2014년 개관할 때만 해도 시비 걸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지금까지 항의한 분은 딱 한 분 말고는 없었어요. 지금은 역사로 인식하는 것 같아요.”

벽을 돌아가면 옛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현장이 나온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김근태 고문 은폐 사건의 고문현장을 재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거짓 기자회견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고문현장에는 칠성판이 놓여있다. 칠성판은 안장을 할 때 죽은 사람을 눕히는 곳이다. 하 연구사는 “인권 침해가 가장 심각한 공간이 고문장”이라며 “칠성판은 그 위에 눕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협박”이라고 말했다. 열사 중에는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망가지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많다.

▲ 물고문 장면을 재현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현장이다. © 김태형

전시의 가장 큰 목적은 민주시민교육이다. 하 연구사는 고문현장 세트에 관해서도 “이걸 본 학생과 보지 않은 학생은 나중에 분명해 다를 것”이라며 “인권이 무엇인가를 어렸을 때부터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

‘유영봉안소’에는 현재 60명 열사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136명이 모이면 완성된다. 죽음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어 밝은 분위기의 사진으로 꾸며 놨다.

▲ 천장의 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와 유영봉안소는 어둡지 않고 밝으면서도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김태형

민주시민교육은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의 핵심 가치다. 야외전시 공간 배치도 아이들을 고려했다. ‘실천: 민주광장’은 추모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공원이다. 위치상 바로 옆에는 묘역이 있지만 공원에 있으면 묘역이 안 보인다. 5m 높이 잔디 언덕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하 연구사는 “묘역이 바로 보이면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다”며 “아이들이 언덕에서 뛰어놀다가 묘역을 발견하게 되는 친근한 공간으로 조성됐다”고 말했다. 언덕 너머 묘역에는 60명 열사들이 잠들어 있다. 향후 136명이 모두 모셔질 예정이다.

▲ 민주공원에 있는 '염원의 빛'. 참배를 위해 마련된 이 조형물은 자유·평등·정의·평화가 구현되고 민주의 큰 세상이 영원히 이어지길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 박성준
▲ 묘역에는 지금까지 60분의 열사가 모셔졌다. ⓒ 박성준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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