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유재인 기자

두 죽음의 무게가 다른 것인가. 최근 안타깝게 숨진 두 청년에게 쏠린 사회적 관심이 대조적이다. 한강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실종돼 엿새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손정민 씨와 안전관리자 없는 평택항에서 일하다 무게 300킬로그램(kg)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진 이선호 씨. 전자는 ‘의대생 실종’ 보도를 시작으로 수많은 언론사가 ‘죽음을 둘러싼 의혹’ 등 후속기사를 쏟아냈다. 반면 후자는 사건발생 여러 주가 지나서야 일부 언론이 보도하기 시작했고, 기사량도 몇 분의 1에 불과하다. 2019년 <경향신문>은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제목 아래 연평균 2000여 명이 산업재해로 숨지는 현실을 집중 조명했는데, 산재에 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그 전으로 퇴보한 듯하다.

수백 년간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온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수십 년 동안 압축적으로 이뤄지면서 부작용도 많이 낳았다. 국가주도 경제개발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선진국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들어갔지만,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노인빈곤율·산업재해사망률 등 ‘어둠의 기록’이 따라붙었다. ‘압축성장’ 과정에서 가장 크게 희생된 것은 노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군사작전식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기업 성장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을 보면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은 일어서면 머리가 천장에 닿는 공간에서 하루 열 시간 넘게 일했다. 먼지투성이 작업장엔 창문조차 없어, 폐병에 걸리는 노동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열악한 작업환경은 ‘옛날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했던 황유미 씨가 2007년 백혈병으로 숨진 것을 포함, 대기업·중소기업·영세기업을 가리지 않고 매년 수천 명의 노동자가 직업병과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최근에는 ‘위험의 외주화’ 추세와 함께 하청노동자·비정규직·실습생 등 취약한 처지의 노동자들이 집중적으로 희생되고 있다. 서울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김모 군,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석탄 컨베이어벨트 사고로 숨진 김용균 씨, 제주도 음료공장에서 현장실습 중 숨진 특성화고 학생 이모 군 등이 대표적인 예다.

▲ 지난 달 22일 평택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선호(23) 씨가 무게 300킬로그램(kg)에 달하는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안전 관리자도, 이 씨에게 주어진 안전 장비도 없었다. Ⓒ KBS

지난해 6월 정의당 강은미 의원의 주도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발의됐다. 산업재해에 관한 기업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 안전조처 강화를 유도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이름에서 ‘기업’을 뺀 채 통과된 법은 기업주가 처벌을 피할 구멍을 만들었고, 이마저도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 대상에서 빼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3년 간 시행을 유예해 실효성이 의심스럽게 됐다. 그래도 재계는 ‘산재 처벌을 강화하면 기업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반발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노동자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한다. 우선 고용노동부는 내년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이달 말 입법예고할 시행령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원청 대기업과 사업주 등의 산재 책임을 분명히 하고, 산업안전을 위해 기업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조처를 명시해 입법취지를 최대한 살려야 한다. 언론은 우리나라 산재 현실을 심층 보도하고, 정부와 기업의 대응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유망했던 청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대중심리를 겨냥해 선정적 보도를 쏟아내는 대신, 노동자의 ‘구조적 죽음’을 막을 대안에 집중해 주기 바란다. 일하러 나갔다 귀가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의 목숨도 똑같이 소중하지 않은가.


편집 : 박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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