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길’

▲ 김현주 기자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근처 KDB생명타워 앞에 작은 공원이 있다. 집에서 ‘따릉이’를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서울역으로 가다 보면 공원 앞을 지난다. 공원은 서울역 12번 출구와 맞닿아 있어 근처를 지날 때면 퀴퀴한 냄새가 난다. 어느 여름 날, 등을 보인 사내의 발 아래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 악취의 원인을 알았다. 변변한 운동기구나 놀이기구 없이 앉을 자리 몇 개가 전부인 공원에는 쪽방촌 주민들이 나와 앉아있다. 그들 옆에는 쓰레기와 빈 술병이 굴러다닌다. 그중에는 더운 여름에도 패딩을 입거나 눈에 초점이 없어 오싹한 느낌이 드는 사내들도 있다. 공원 앞 인도는 빈 술병과 쓰레기, 담배꽁초로 늘 더럽다. 그들은 쪽’방’에 살고 있지만 노숙인과 다를 바 없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더러운 길을 청소하던 이는 휠체어 탄 사내였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공원 근처를 맴돌았다. 오랫동안 감지 않았는지 머리카락끼리 심하게 엉겨 붙은 다른 사내가 휠체어를 밀어주는 날도 있었지만, 휠체어 탄 사내는 거의 혼자였다. 그의 왼쪽 다리는 무릎 정도에서 잘려 있었다. 다리 끝은 뭉툭했고 매끈해 보였다. 그는 초록색 플라스틱 빗자루를 들고 머물던 자리를 쓸고, 힘껏 바퀴를 굴려 옆을 쓸었다. 사내의 빗자루질 덕분에 길이 깨끗해졌다. 노숙인이 청소하는 모습을 나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더럽고 게을러 보였다. 그들에게는 ‘깨끗함’이라는 감각은 없을 듯했다. 길 위에서 만난 휠체어 탄 사내는 내 편견을 깨 주었다. 

길은 우연의 공간이다. 길 위에서는 누구든 마주칠 수 있다. 나와 같은 생활 수준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같은 범주로 묶이지 않는 이들이 길에 있다. 길은 사고를 확장하고 타인과 연결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공통의 공간을 축소하며 만남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위클리공감> 인터뷰에서 어느 사회가 얼마나 건전한지 알려면 단위 면적당 벤치 숫자를 보라고 했다. 벤치가 많은 도시는 벤치가 적은 도시에 견주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추억을 가질 가능성이 커진다고 한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900m 구간에는 벤치가 200개쯤 있는데 같은 길이인 신사동 가로수길에는 4개밖에 없고, 대신 돈을 내고 들어가는 카페가 그 공간을 대신한다. 커피값을 낼 수 있는 사람들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길 위에서 뒤섞이지 못하고 단절된다.  

▲ 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길에서 뒤섞이며 각자의 편견을 깬다. Ⓒ Pixabay

2019년 말 서울 마포구 한 아파트가 논란이 됐다. 그 아파트는 소셜믹스 정책에 따라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이 단지 안에 함께 조성돼 있었다. 4~10층에는 임대세대가 살고 12~29층에는 분양세대가 살았다. 한 건물인데도 임대세대와 분양세대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썼고 출입구도 달라 동선이 겹치지 않았다. 임대세대는 비상계단도 11층 이상으로는 이용할 수 없었다. 완벽한 ‘길’의 분리였다. 

1972년 미국 중부 세인트루이스 도심에 지어졌던 11층짜리 아파트 프루이트 이고가 폭파됐다. 계획 초기 단계부터 심리학자, 사회학자 등이 참여해 각종 건축상을 휩쓸었던 최고급 아파트였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입주민 사이 인간적 유대관계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는 것이 프루이트 이고의 실패 원인으로 지목됐다. 우리 사회도 프루이트 이고와 같다. 서로 삶을 보고 듣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오해는 쌓여 갈등의 불씨가 된다. 불통과 오해가 만든 갈등의 피해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타격하고 결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마주쳐야 하는 이유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예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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