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유리천장'

▲ 윤상은 기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때 롤모델을 찾는다. 역사 속 위인, 성공한 사업가, 정치인, 큰 가르침을 준 스승, 좋은 영향을 준 지인 등을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게 롤모델 배제 기준이 생겼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위인은 시대마다 다르다. 동시대에 살더라도 머리가 아주 탁월하거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나와는 다른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일 따름이다. 또 하나, 남자라면 그와 내가 겪을 인생 역경이 다를 확률이 높다. 

<여성신문>은 2019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여기는 20대 여성 1169명에게 롤모델을 물었다. ‘없다’가 33.27%로 1위였다. 꼬불거리지만 아름다운 인생 길을 보여주는, 그 길에서 만나자고 말하는 이가 많으면 좋으련만.

시인 문정희는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에서 물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이 물음은 1997년에 던져졌지만, 지금도 유효하다. 한국의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은 2009년부터 2019년까지 OECD 국가 중 33위였다. ‘경력 단절 여성’은 많이 들어봤지만, ‘경력 단절 남성’은 생소하니 놀랍지 않은 순위다. 

코로나 시국에서 여성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내놓은 9월 고용동향을 보면 15세 이상 여성 고용률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5%p 줄었다. 남성은 0.9%p 하락했다. <이코노미스트>는 2019년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의 여성 관리자가 10명 중 1명, 기업의 여성 임원은 100명 중 2명이라고 발표했다. 

▲ 드라마 <산후조리원> 포스터 ⓒ tvN

가족 내 돌봄노동을 책임지느라 취업, 승진 등에서 멀어지는 이가 많다. 하이퍼리얼리즘 출산 드라마 <산후조리원> 속 주인공은 최연소 여성 임원이 되자마자 임신했다. 그는 산후조리원에서 잠시 외출해 회사에 남겨둔 일을 하러 간다. 다른 임원이 이미 대체하고 있길래 서둘러 회사를 나온다. 그는 잠시 상실감과 위기감을 느꼈지만, 복직하면 아이를 돌봐줄 친정 엄마와 응원하는 남편이 있어서 해피엔딩을 맞는다.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최근 한 회사 계약직 사원인 친구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을 꺼냈다. 정규직 전환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30대 후반 계약직 여자 동료에게 애인이 생겼다. 친구의 상사는 ‘곧 결혼해서 아이 낳으러 갈 사람보다 아직 젊은 네가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친구는 회사를 잘 다니는 요령을 하나 터득했다. 나이, 성별, 근로 형태에 따라 연애, 결혼, 출산이 약점일 수 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2015년 취임하면서 남녀 동수로 내각을 구성했다.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 그가 말한 이유다. 한국의 저조한 여성 경제활동 수치, 어두운 주변 이야기는 아직 길이 좁은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대다수는 따라갈 길이 없어서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고 집에 머문다. 황무지에서 길을 닦는 여성도 있지만, ‘여성 최초 00’으로 기사가 나올 정도로 희소하다. 평범하게 남들 사는 대로 살아도 인생 무대가 다양해야 한다. 10년, 20년 뒤에 태어나는 여성은 다양한 롤모델을 보고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말해야 한다. "지금은 2021년이니까요."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은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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