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㉕ 옛 군산세관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일제강점기 항구도시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라북도의 북서쪽에 치우쳐 있는 군산은 금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드넓은 호남평야를 배후에 둔, 내륙 곡창지대와 서해의 풍성한 어장을 모두 갖춘 곳이다. 농수산 자원이 풍부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 군산은 호남평야와 서해를 끼고 있어, 옛날부터 농수산 자원이 풍부했다. © 이예슬

고려시대에는 세곡의 수납∙보관∙운송을 담당하던 조창인 ‘진성창’이 설치돼, 이곳에 보관된 곡식을 노리는 왜구가 자주 출몰했다. 고려 우왕 때인 1380년에는 왜구들이 500여 척 대선단을 끌고 들어와 노략질을 하다, 최무선이 지휘하는 화포 탑재 신형함선 100척의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최무선이 만든 화약을 처음 사용해 1만여 명 왜구를 섬멸한 해전으로, ‘진포대첩’으로 불린다. 군산항에서 금강을 따라 15km쯤 올라가면 나오는 금강 갑문 아래 진포대첩기념탑이 있다.

조선 세종 8년에는 군산 지역 해상방어와 조운 업무를 담당하는 군산진이 설치됐다. 군산진은 조선시대 최대 미곡물류 관리청이었는데, 중종 때 설치된 ‘군산창’과 익산의 성당창을 관리했다. 

일제의 무관세 횡포에 대항한 조선 해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항이 개항된 뒤 목포∙진남포∙마산에 이어 군산은  1899년 5월 1일 문을 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개항과 함께 군산에 개항장을 관리하는 감리서와 함께 해관(海關)을 설치했다. 이는 1876년 개항 직후부터 강제된 일본과의 무관세 무역을 시정하고, 관세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됐다. 

조선 조정은 일제가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부산항 등에서 관세없이 화물을 반출입하자 관세주권 회복을 위해 1878년 9월 28일부터 개항장인 부산 두모진에 해관을 설치하고 관세를 부과했다. 일제는 그해 11월 29일 군함을 끌고 쳐들어와 해병대를 상륙시켜 해관 주변을 둘러싸고 위협했고, 결국 조선 조정은 12월 26일 해관을 폐지했다.

이처럼 개항 후 6년여 동안 무관세 수출입을 해왔던 일제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이 조선의 관세권을 정식으로 인정하자 조선의 관세권을 인정했다. 그에 따라 1883년 5월 12일 인천에 해관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10월 1일 원산해관, 10월 4일 부산해관이 문을 열고 관세를 물리기 시작했다.

▲ 1920년대 중반 군산 내항에 일제가 수탈한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1907년 관세주권 상실, 쌀 수탈 기지로 

당시 조선은 관세 행정과 해관 운영 경험이 없었으므로, 청나라 리훙장의 알선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용해 해관 창설과 운영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후 1897년 목포에 해관이 설치된 데 이어 1899년 군산에도 해관이 설치됐다. 하지만 조선의 해관들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운영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1907년 일제는 해관의 이름을 ‘세관’으로 바꾸고, 관세국 관제를 제정해 조선의 관세주권을 강탈했다.

이후 군산항은 일제가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던 전진기지로 전락해 항구에서 실어낸 전체 물량의 90% 이상이 쌀이었다. 1909년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30%가 군산항을 통해 빠져나갔고, 1934년에는 전국 총생산량의 50%에 이르는 200만 석 쌀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일제의 쌀 수탈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군산항은 해방이 되면서 무역항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침체돼 있다가 1979년 외항 완공을 시작으로 군산-장항국가 산업단지 지원과 중부권 물류거점 항만육성을 위한 ‘군장신항만개발계획’에 따라 급성장했다. 1995년에 제3부두가 준공된 데 이어 1997년에는 자동차 전용 제4부두가 완공됐다. 2000년 이후에도 제5부두, 국제여객부두, 컨테이너 양곡 전용 제6부두가 잇달아 준공됐다.

군산항은 급성장세를 보이면서 특히 자동차 완성차와 관련 부품 수출항 역할을 해왔는데 최근 물동량 급감으로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군산항을 통한 자동차 수출은 한때 연간 32만대까지 올라 갔으나 지난 2018년 5월 한국GM군산공장 폐쇄 이후 물동량이 급감해 작년에는 연 3만대를 밑돌았다.

▲ 일제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해 일본으로 실어 내던 군산 내항의 지금 모습. © 이예슬

군산역에서 차를 타고 21번 국도를 따라 군산내항 쪽으로 10분쯤 가다 보면 ‘군산근대화거리’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근대화거리가 있는 장미동(藏米洞)은 ‘쌀을 보관하는 동네’라는 뜻이다. 개항 이후 군산항의 주요 역할은 호남평야의 쌀을 모아, 그것을 다시 일본으로 반출하는 것이었다. 군산에는 반출 전 쌀을 도정하는 정미소가 10여 개나 들어섰고, 쌀을 저장해 두는 창고도 많이 생겼다.

군산근대건축관부터 시작해 근대미술관을 지나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박물관 뒤편으로 가면 ‘부잔교’라는 이름의 큰 다리들이 바닷물 위에 떠 있다. ‘뜬다리 부두’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간조와 만조의 수위 변화에 상관없이 큰 배를 접안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시설이다. 조수 간만의 차로 달라지는 바닷물의 수위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다리에 콘크리트 함선이 연결된 일체형으로, 밀물과 썰물에 상관없이 콘크리트 함선이 접안시설로 이용된다. 1926년에는 기선 3척 이상이 접안할 수 있는 제3부두 ‘뜬다리’가 완공됐고, 같은 해 6월에는 3천톤급 이상 기선 6척이 접안할 수 있는 제4부두 ‘뜬다리’ 기공식에 사이토 총독이 참석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 군산내항의 부잔교는 조석 간만의 수위에 따라 다리가 오르내려서‘뜬다리’라 불렸는데 일제는 이 부두 시설을 이용해 엄청난 양의 쌀을 수탈했다. © 이예슬

침탈의 역사 기억하는 관세박물관

부잔교를 뒤로 한 채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서쪽으로 돌아가면 ‘옛 군산세관’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는 푸른색 대문이 보인다. 군산세관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드는 물품의 관세를 거두던 곳이다. 1908년 6월에 지은 서양식 단층 건물로, 건물 앞쪽에 비를 막을 수 있도록 포치를 설치했고 외벽은 낮은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 ‘불란서 사람’ 혹은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해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건물 지붕은 뾰족하고 직선적인 느낌의 고딕 양식, 창문은 둥근 아치가 두드러지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현관 처마를 끄집어낸 것은 영국의 건축 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 양식을 융합한 근대 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서울역사, 한국은행본관과 함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 1908년부터 사용된 옛 군산세관 본관은 호남관세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이예슬

해방 후 대한민국의 세관으로 사용된 군산세관 건물은 1993년 그 옆에 2층짜리 세관건물이 신축되면서 호남관세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옛 군산세관은 역사와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5호로 지정됐다. 군산세관 건물에는 세관 관련 유물과 사료 1,4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관세청의 주요 업무와 시대별 수출입 품목, 마약 탐지견의 역할, 그리고 시대별 밀수 변천사까지 알 수 있다.

▲ 호남관세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옛 군산세관에는 세관 유물과 사료가 많이 전시돼 있다. 세관장이 업무를 보던 방도 재현해 놓았다. © 이예슬

개항부터 일제강점기에는 통관 체계가 확립되지 않아 밀수출이 잦았다. 쌀과 콩이 대표적이었고 1894년 이후 백동화가 통용되면서 백동화 제조용 금괴를 밀수하는 일도 많았다. 해방 후에는 인플레이션 탓에 고추, 담배 등 생활용품 밀수가 성행했다. 1950년대에는 전쟁 중 군복 같은 미군수품을 부정 유출하거나 탄피나 고철, 미화를 밀수출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생필품에서 사치성, 고가품으로 밀수 품목이 전환됐고 80년대에는 컨테이너를 이용해 위장 밀수하는 등 밀수 수법이 지능화되고 품목도 다양해졌다. 최근에는 국제우편을 이용해 부피가 작고 비싼 마약이나 지식재산권 위반 물품, 일명 ‘짝퉁’을 밀수하는 일이 가장 많다고 한다.

세관 창고는 인문학 카페로 변신

옛 군산세관 본관 뒤편으로 가면 세관 창고로 쓰인 오래된 건물이 나타난다. 본관과 같이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은 밀수품을 보관하는 군산세관의 창고로 활용되다가 지난 2018년 인문학 카페 ‘정담’으로 변신했다. 군산대 산학협력단과 군산문화협동조합이 위탁을 받아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역사·문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음악회와 역사강연, 인문학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복합문화예술 플랫폼이다.

▲ 군산세관 창고였던 인문학 카페 ‘정담’의 출입문(위 왼쪽)과 카페 내부 모습들. © 이예슬

인문학 카페답게 카페 양 벽면의 높은 서가에 엄청난 양의 책이 꽂혀 있고, 중간중간 강아지 인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1900년대 초 군산세관사로 부임한 프랑스인 ‘라포트’는 반려견인 프렌치불독을 데리고 왔다. 당시 프렌치불독을 처음 본 조선 사람들은 그 코가 마치 돼지코를 닮았다며 먹성 좋게 생긴 ‘먹방이’라 불렀다. 이 일화를 바탕으로 ‘먹방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군산을 알리는 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다. 카페에서는 군산 사람들이 군산에서 만든 찰보리와 팥앙금 디저트를  판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 오래된 트러스 구조 천장이 눈에 띈다. 트러스 구조란 목재나 강재 등 2개 이상의 재료를 삼각형 형태로 조립해서 만든 것으로, 하중을 지탱하는 힘이 안정적이어서 지붕이나 교량처럼 넓은 공간에 많이 쓰인다. 1908년부터 있던 목재 트러스 천장은 카페 방문객들을 100년 전 세관 창고로 이끌어 간다. 

‘부숴 없애기보다 보전해 잊지 말자’

작가 배지영은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 군산’에서 군산을 ‘타임머신에 오르지 않고도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도시’라고 했다. 말 그대로 2021년 겨울 한가운데서 보는 군산은 지난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채만식이 그의 소설 ‘탁류’에서 묘사한 것처럼, 군산은 왜곡된 식민지 근대화 정책의 핵심 도시였다. 지금 군산은 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 흔적을 되살려내 일제의 침탈을 되새기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성화하고 있다. 옛 세관을 포함해 쌀 수탈의 본산이던 조선은행 군산지점을 근대건축관으로 바꿨고, 군산 상권을 쥐락펴락한 일본인 상인 ‘히로쓰’의 집도 ‘히로쓰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해 역사의 교훈을 전한다.

그 밖에도 일제가 건설한 터널인 ‘해망굴’을 보행자 전용으로 바꾸어 보존하고,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도 보존해 두고 있다. 일시적 감정으로 부숴 없애 버리고 부끄럽고 아픈 역사까지 잊어버리는 것보다 아픈 흔적들을 보전해 기억하면서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 ‘타임머신’ 군산이 던지는 메시지다.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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