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II]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주제 ② 정치검찰 70년사

‘검찰이 바로서야 한다.’ 특강 시작부터 끝까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강조한 메시지였다. 한 교수는 ‘정치검찰 70년사’를 주제로 한 두 번째 강연에서 “검사가 자의적으로 봐주는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힘이자 문제”라고 짚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한 교수는 일제강점기부터 문 정부에 이르기까지 검찰권력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 한홍구 교수가 지난 9월 25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정치검찰 70년사’라는 두 번째 주제강연을 하고 있다. ⓒ 김신영

해방 직후 ‘강한 경찰, 약한 검찰’ 구도

한홍구 교수는 검찰의 힘이 세진 이유로 “일제강점기에는 경찰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검찰의 힘을 좀 키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사가 아무리 무서워도 검찰이 순사를 통제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형사령’을 공포하면서 검사와 경찰에 무제한 강제수사할 힘을 부여했다. 조선형사령은 경찰이 검사의 지휘를 받아 범죄를 수사하고 검사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실상에서 검사가 경찰에 확고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한 교수는 해방 뒤 줄어든 검사의 수를 적시하며 해방이 되자 일본인 검사가 물러갔다고 말했다. 조선인 검사도 있었지만 극히 일부였다는 것이다. 경찰 조직과 비교했을 때 검사 인원이 적은 탓도 있다. 경찰은 10만 명이 넘는데 검찰은 다 합쳐야 1500명이었다. 한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이 검찰공화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검찰공화국이란 말이 노태우의 6공화국 때 처음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는 검찰 출신 몇몇이 좋은 자리에 간 것일 뿐 검찰 자체 힘이 이렇게 크지는 않았다”며 “그 사이에 검찰의 권력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전두환 시대 검찰은 힘이 약했다

한 교수는 과거에는 검찰의 힘이 약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의 정통성을 위해 ‘인혁당사건’을 이용했다. 한 교수는 “정부 출범 이후 반년 만에 일어난 시위의 의미를 반감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혁당사건’은 유신정권 시대에 정치권력에 종속된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불법으로 얼룩진 사건이다. 특히 1974년 4월, ’2차 인혁당사건‘의 핵심 내용이던 ’북괴의 지령’은 조작이었다고 말했다. 

중앙정보부 발표에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이 아니고 우리나라 첩보기관이 북으로 침투시킨 북파 간첩인 사실이 드러났다. 한 교수는 국정원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람들을 ’폭행‘해 사건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기소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공안부가 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인데 조작은 하면 안 된다는 도덕성은 있었다“고 말했다. 

▲ 1964년 9월 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검찰내부에 이론’ 기사. 인민혁명당 사건 기소를 둘러싸고 서울지검 공안부 내부에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 <조선일보>

일부 검사의 도덕성도 ’검사동일체 원칙‘ 앞에서는 무기력해졌다. 서울지검 부장 4명이 전원 사표를 내며 버텼다고 한다. 한 교수는 이를 ’양심적 기소 거부사건‘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기소하면 그만이었다. 수사를 누가 했건 다른 검사가 기소장에 사인해도 법적 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1975년 4월 8일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8명에 사형을 확정하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했다. 하지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인혁당사건이 조작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혁당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박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홍구 교수는 전두환정권 때 검찰이 치욕을 겪은 사건으로 ‘저질연탄 사건’을 소개했다. 당시에는 주연료인 연탄의 품질이 서민의 주요 관심사였는데 이때 연탄 제조사들이 저질연탄을 만든 사건이 불거졌다. 한 교수는 “검찰이 조사해서 밝히니까 처음에는 전두환이 칭찬했는데 나중에는 검찰총장이 날아갔다”며 당시 관련자들 뒤에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이 사건이 당시 검찰이 얼마나 힘이 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권력의 민주화가 ‘검찰공화국’으로

한 교수는 검찰공화국의 시작은 안기부의 퇴조와 맞물려 있다고 설명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군부정권이 끝나고 노태우정권이 등장했다. 군부가 퇴조하고 시민의 권력이 커지자 안기부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빈 자리를 검찰이 메꾸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기춘이다. 기점은 1991년 5월. 노태우정권 퇴진 투쟁은 총 2361회나 집회가 열리고 최대 40만 명이 참여한다. 6월 민주항쟁 후에도 정권을 내줬다는 분노와 1989년 동구권 붕괴에 따른 혼란이 뒤섞였다. 

노태우정권은 정권을 총력 방어하기 위해 내각을 개편하면서 법무부장관에 김기춘을 임명했다. 검찰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으로 정국을 반전시킨다. 김기춘은 한참 뒤인 2014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재심에서 사건 연루자 16명 중 마지막으로 언급된다. 한 교수는 “앞에 나가서 돌 맞은 사람들 목소리가 커지는” 것처럼 이 사건으로 검찰의 힘과 위상이 높아졌다고 설명한다. 이후 노태우정권의 비서실장, 법무부장관, 안기부장, 청와대 사정수석과 민정수석 등 ‘힘있는 자리’를 전부 검찰 출신이 차지한다. 이때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대한민국은 진정한 검찰공화국이에요. 검찰공화국이란 말은 노태우 6공화국 때 처음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때는 검찰 출신 몇몇이 좋은 자리에 갔지만 검찰 자체 힘이 이렇게 크진 않았어요. 그 이후 검찰이 엄청나게 권력화했습니다.”

한 교수는 “검사가 마음만 먹으면 기소장에서 핵심적인 범죄사실을 빼거나 확실한 증거를 뺄 수 있다”며 검찰의 힘은 ‘봐주는 힘’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공소장 ‘일본(一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 하나만을 제출하고 기타 서류나 증거물은 제출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 때문에 판사의 개인적 판단과 상관없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한 교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 BBK 사건을 예로 들었다. 한 교수는 2007년 검찰 수사 당시 “이명박을 구속기소해도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검찰이) 다 무혐의로 처분했다”고 말했다. 

조국 사태의 배경, 문재인 대통령 트라우마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휘호를 쓴 김대중정권은 개혁의 도구로 검찰을 활용했다. 한홍구 교수는 “그때가 검찰개혁을 세게 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오히려 검찰을 보호해줬다”고 말했다. 노무현정권은 강금실 변호사, 천정배 변호사를 법무부장관으로 앉히며 검찰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검찰조직은 거세게 반발했다. 2005년, 천정배 장관은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사건에 헌정사상 처음으로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불구속수사 지시를 수용하면서도 사표를 던졌다. 한 교수는 이 사건을 “검찰이란 조직이 조직의 수장도 조직 이익을 위해서는 잘라버리는 조직”임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 저널리즘스쿨 재학생들이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 김지연

청와대와 검찰이 충돌한 이때 민정수석이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문재인 민정수석을 다음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려 했지만 여야의 거센 반대로 친기업 성향의 김성호 검사가 기용됐다. 한 교수는 “이 경험이 문 대통령에게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라며 조국 사태를 언급했다. 조국 법무부장관을 고수한 바탕에는 ‘내가 검찰개혁을 못 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아픔이 있지 않겠냐는 설명이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

“시그널’이라는 드라마 보셨어요? 거기 나오는 대사죠. ‘지금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그죠?’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한 교수는 강의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물었다. 한 교수는 조국 장관이 다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조국을 잡는 검찰의 태도는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모든 개혁은 검찰을 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검찰개혁이 필수적”이라며 언론인 지망생들이 현업에 나가면 검찰개혁에 나서 달라고 당부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한홍구 홍종호 이상수 강유정 이주헌 허효정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방학 때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김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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