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II]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주제 ① 한국의 진보와 보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한홍구 홍종호 이상수 강유정 이주헌 허효정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방학 때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민족 대신 한미동맹 받드는 한국의 보수

“지도교수가 아버지의 친구분이었습니다. 현대사를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몸을 숙이시면서, ‘어떡하려고 그러냐, 너 다친다’고 했어요. 근데 아직 다치지 않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미개척 분야 공부한다고 하면, 힘들지만 전문가라면… 해보라고 해야 할 텐데, 한국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국현대사 연구에 몰입해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충북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인문교양특강을 했다. 현대사를 전공한 원로 역사학자가 드문 것은 과거 역사학자들이 기피하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때 현대사를 공부하다 잡혀 들어가는 이도 많았다. 한 교수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라는 첫 번째 주제 강연에서 “한국의 보수는 자부심도 없고 지킬 게 없는데 어떻게 보수세력이라 할 수 있냐”고 말문을 열었다. 

▲ 한홍구 교수가 지난 9월 25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수염을 길렀으나 이젠 말끔하게 면도를 했다. ⓒ 신현우

전례 없는 일은 “아니 되옵니다”로 일관

한국은 두터운 보수적 토양을 가진 나라다. 사극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사가 “전하 아니 되옵니다, 전례 없는 일이 옵니다”인 이유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이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다. 한국은 왕조의 지속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던 나라였다. 기본이 500년이었다. 조선 518년, 고려 475년, 신라는 천년왕국이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는 한 왕조가 일본, 중국과 비교해도 상당히 긴 기간 집권했다”며 “그동안 기득권 세력이 공고해질 뿐만 아니라 왕조가 바뀌는 순간에도 기득권 교체가 일어나지 않아 보수가 대표하는 기득권층의 세력 기반이 오랜 기간 더 흔들리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근현대에 들어서도 일제강점기는 물론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등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때 저질러진 일들을 한 번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그는 한국 보수의 특징 중 하나로 민족보다 동맹을 숭상한다는 점을 꼽았다. 보수집회에 미국 국기가 등장하는 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그는 이를 과거 미군정 시대 흔적으로 본다. 그는 “3.1절 날까지 성조기가 날린다, 우파 지표라 하면, 그 나라 깃발이 휘날려야 하는데, 한국과 일본 우파가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다.

▲ 범보수단체가 지난해 10월 9일 한글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조국 법무장관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글로벌 스탠다드(국제기준)에 비춰본다면, 우파는 민족을 내세우고 좌파는 계급을 내세워야 하죠. 우리 우파는 민족 대신 동맹을 상전으로 떠받듭니다. 이승만 시대부터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돌이켜보면 계급 내세운 사람들이 사형당한 게 아니라, 평화 통일을 주장한 진보당, 인혁당 다 통일에 방점을 뒀던 세력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민족을 얘기하는 게 불온하고 빨갱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민족 문제까지 진보가 얘기합니다. 진보가 계급만 짊어지는 것도 벅찬데, 민족까지 짊어지니 스탠스가 꼬이는 거죠.”

진보당은 1956년에 죽산 조봉암 선생을 중심으로 창당됐다. 평화통일과 남북대화를 주장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조 선생 등을 간첩죄로 사형시키고 당을 해산했다. 인혁당사건은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며 언론인, 교수, 학생, 재야인사 등 민주인사들을 탄압한 것이다. 관련자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일어난 의문사 규명을 위해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됐다. 위원회는 2002년 인혁당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보수∙진보가 뒤섞인 한국 정당, 민주당이 보수당

“한국은 진보와 보수가 섞여 있어 헷갈려요. ‘극좌’라 불리는 정의당이 중도 우파이고 민주당은 보수정당입니다. 국민의힘은 보수당 취급도 못 받아야 해요, 김종인 들어간 뒤 조금 달라졌지만, 그전까지 행보는 ‘극우 중 극우’라 평가받아야 할 겁니다.” 

그는 대선과 총선을 거치며 소위 ‘대안 없는 보수의 몰락’이 찾아온 원인으로 ‘건강한 진짜 보수’의 실종을 꼽았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보수세력이 사라지고, 도덕적 헤게모니를 보수세력이 갖지 못한 탓이 크다”고 진단했다. 보수정당을 향한 비판도 이어졌다. 

“보수란 뭐예요? 지키는 거잖아요. 그런데 ‘국민의힘’이 이름을 몇 번 바꿨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정치학자나 현대사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얘기하다가, 그 당시 당 이름이 뭐였지? 막 헷갈려? 3~4년마다 이름을 바꿨습니다. 보수 정당이 맞나요? 이름 석 자가 얼마나 소중한 건데. 우리 정치판이 그래요, 민주당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한국사회에서 건강한 보수와 진보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사회적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 저널리즘스쿨 학생 30여명이 마스크를 쓴 채 거리두기를 하며 강연에 집중하고 있다. ⓒ 신현우

사회발전은 진보세력 집권만으론 안 돼 

"진보세력 집권을 통해서만 역사 진보가 이뤄지는 건 아닙니다. 보수도 보수의 가치를 지키더라도 역사가 진보합니다. 똑똑한 보수, 깨어있는 보수는 이래서 중요한 겁니다. 꽉 막힌 보수만 있어서도 안 되고, 꽉 막힌 진보만 있어도 정치는 피곤해요. 부딪혀서 싸우다가 진보의 힘이 치고 나가고, 보수세력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하게 되는 거죠.”

한 교수는 세상이 나아졌음의 기준이 진보세력 집권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진보가 주장하는 강한 복지정책, 보통선거제도 등이 실은 보수세력에 의해 도입된 경우가 많다며 진보가 정치적으로 집권하지 못한 시기에도 역사는 진보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싸우면서, 더 좋아질 수 있는 여지를 찾으면서, 계속 좋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보∙보수 이념 잣대가 아니라, 부끄러움 없이 일관성 있게 진보와 보수의 가치 기준을 어떻게 지니고 살아가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보수의 허약함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책임을 무섭게 지는 게, 그게 보수의 진짜 가치죠. 보수가 가치를 지킴으로써 역사가 진보한 거예요. 보수가 보수다울 때 역사가 진보합니다. ‘꼴보수’들이 진보적인 역할을 했는데, 장준하 선생은 죽을 때까지 ‘꼴보수’였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 역사 진보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하신 거죠.” 

장준하 선생은 죽을 때까지 ‘극우’였지만, 삶의 태도가 진보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며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다 ‘긴급조치1호’ 위반자로 지목돼 수감됐다. 

19세기 영국 정치가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업적도 언급됐다. 그는 보수당 지도자이면서 노동자와 농민에게 선거권을 확대하는 선거법 개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홍구 교수는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시대, 진실 따위가 중요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며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편집 : 방재혁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