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재난의 불평등성'

▲ 양수호 기자

김이듬 시인을 인터뷰하려고 10월 중순 경기도 고양에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불길한 느낌이 들어 가방을 뒤적거렸다. 인터뷰 대상자의 시집을 기숙사에 두고 온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 넉넉해 지하상가 서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 공기였지만, 고양은 코로나19 확진자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걷는 도중에도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했는지 확인했다. 지하상가 모습은 좀 충격적이었다. 성인 앉은키 정도인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음식점과 꽃집, 교복가게가 마주 보고 있었다. 상가 출입구는 세 곳이었는데 체온을 측정하거나 명부를 작성하는 조처마저 없었다. 화구 앞에서 마스크를 내린 상인도 목격했다. 호기심이 발동해 상인에게 물어보니 이전에는 칸막이조차 없었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감염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지하상가는 무방비 상태였다.

전염병 시대가 도래하며 의약품과 방역도구, 공간에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코로나19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선진국들이 앞다투어 경쟁하고, 일상을 지키기 위한 방역도구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도시 건축물과 공간에 관한 논의 역시 활발하다. 아파트와 사무공간에 테라스와 여유 공간을 두어, 공기가 순환하고, 접촉을 줄이자는 취지다. 한국에서도 상당수가 아파트, 오피스텔, 원룸, 다가구주택 등 집단 주거 시설에 산다. 집단 주거 시설에서 개인 공간은 명확하게 나뉘어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벽 하나를 뒀을 뿐,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염병에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재택근무가 늘어가는 점도 공간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다. 사회 일각에서는 인구 밀집 형태의 도시 중심 사회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 사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주거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 건축학자인 홍익대 유현준 교수는 코로나19 이후의 집과 도시에 관해 "전 세계 인구 절반 정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데, 전염병에 강한 도시 구조를 만드는 국가가 앞으로 높은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코로나19 발생 이후를 도시 건축 전반에 있어 공간의 재배치, 재발견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했다. © KBS

도시와 건축, 주거의 변화를 역설하는 사례가 있다. 지난 8월 홍익대는 자동차를 이용한 드라이브스루 졸업식을 했다. 당시 ‘유난 떤다’ 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일부 지자체는 코로나19로 생계가 어려워진 농가를 위해 지역 특산품을 드라이브스루 상점에서 판매했다. 미국에서는 드라이브스루 예배와 고해성사, 결혼식까지 열렸다. 이색적인 풍경이지만, 전염병에 맞서 살아가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건물 중 하나가 내부 한가운데를 비우고 정원을 만들었다거나, 공용주택 임대면적을 줄여 공원을 만들었다는 뉴스가 놀랍지 않다.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한 페스트도 현대 건축물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유럽은 상하수도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탓에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밀집된 공간과 목욕 문화도 페스트가 확산한 이유였다. 현대 건축물은 페스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수많은 희생을 남긴 페스트가 종적을 감추며 현대 건축물은 공간을 세분하고 구획하게 됐다. 파리가 최초로 하수도를 개발하게 된 것도 장티푸스와 콜레라 같은 전염병 때문이었다. 역사는 같은 맥락과 다른 모습으로 윤회한다. 페스트 이후 등장한 전염병 중 가장 강력한 코로나19로 인류는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많은 이가 건축물과 공간에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보다 작은 단위로 공간이 구분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움직임 속에 배제되는 이들이 있다. 고양에서 본 지하상가 상인들처럼 전염병에 노출된 보통 사람들이다. 재난에서 살아남는 첫째 방법은 최대한 자신을 노출하지 않아야 한다. 재택근무자들은 밖으로 나가야 돈을 벌 수 있는 이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건설현장, 식당, 운전, 청소 등 육체노동으로 먹고사는 이들은 재택근무가 불가능하다. 불특정 다수를 매일 접촉해야 한다. 광각의 시점에서 본 사회계층은 세분돼 있다. 고시원에서 사는 이들은 새로운 건축기법이 도입돼도 이름 모를 이들과 벽 하나를 두고 살아야 한다. 건축기법이 발전해도 고시원은 고시원이다. 과거와 비교해 변하지 않은 고시원의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다가구주택과 원룸에 사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주거공간을 선택할 때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무엇일까? 공간의 쾌적함보다는 금전적 이유가 먼저일 것이다.

▲ 페스트 이후 등장한 전염병 중 가장 강력한 코로나19로 인류는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많은 이가 건축물과 공간에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보다 작은 단위로 공간이 구분될 가능성이 높다. © pixabay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근접학’에 따르면 사적인 공간은 물리적 거리에 따라 나뉜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밀한 유대 관계가 전제되는 친밀함의 거리는 46㎝ 이하, 어느 정도 친밀함이 형성된 개인적 거리는 46~122㎝, 사무적인 대화가 주가 되는 사회적 거리는 122~366㎝, 연설이나 강의를 할 때 발생하는 공적 거리는 366~762㎝로 구분한다. 서양인보다 체구가 작은 동양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거리는 더 좁아진다. 전염병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적인 공간이란 언제든지 공적인 공간으로 변환하는 곳이다. 타인과 거리를 좁힐수록 위험 부담이 높아지는데 타인과 거리를 넓힐 수 없는 이들도 많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지하철에 탄 이들과 2018년 종로 고시원 화재로 숨진 이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도 존재한다. 재난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평범하고 가난할수록 재난의 당사자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전염병 시대의 도시와 건축, 주거의 변화는 누군가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 어떤 이는 집에서 숨을 쉬기 위해 공원과 정원을 만든다. 반면 어떤 이는 집에서 식물 하나 가꿀 여유가 없다. 유럽과 영미권에서는 재채기를 하는 타인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God Bless You)이라고 말해주는 관습이 있다. 오직 마스크로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오늘도 행운에 의탁해 살아가야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이봉수)

편집 : 김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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