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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가장 긴 무덤’…잠들지 못한 영혼들

기사승인 2020.12.28  16: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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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호 기자 protects55@naver.com

- [단비현장] 대전 골령골 한국전쟁 학살 현장

지난 5일 오전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산내 골령골로 가주세요” 하자 택시기사가 힐끗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툭 던졌다. “대전 사람들도 잘 안 가는 곳인데…”. 그도 초행길인지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출발했다. 대전역에서 동남쪽 옥천 방향으로 30분쯤 달려 도심을 빠져나가자 건물과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난 왕복 2차선 도로로 들어섰다. 택시가 임마누엘교회 앞에 이르자 표지판 하나가 나타났다. ‘이곳은 대전교도소 보도연맹 산내 학살 현장입니다.’

   
   
▲ 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에 있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현장’ 부근. 도로 왼쪽으로 보이는 교회 뒤편이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다(사진 위). 골령골 민간인 학살지역 앞 도로변에 세워진 안내 간판(아래). ©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지난 11월 발굴작업 벌여 250구 수습

택시에서 내려 길 건너 산자락에 있는 임마뉴엘교회를 지나 오른쪽으로 접어들자 250~300㎡ 정도 땅이 파헤쳐진 곳이 나타났다. 대전시 동구 낭월동 13번지 일대에 걸쳐 있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발굴 현장이다. 지난 2007년 발굴을 해 34구를 수습하고 2015년 18구를 수습한 데 이어 지난 9월 22일부터 11월 20일까지 세 번째 발굴작업을 벌인 곳이다.

   
▲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 EBS

세 번째 발굴에서는 가로 14m, 세로 20m 되는 지역을 깊이 4m 정도로 파내 유해 250구를 발굴했다. 현장에서는 탄피와 45구경 권총, 단추, 수갑 등도 발견됐다. 대부분 유해들은 서로 뒤엉켜 있거나 구덩이 안으로 마구 내던져진 듯 팽개쳐져 있었고, 흙 대신 무거운 돌덩이에 깔려 있기도 해 참혹했던 학살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는 모습.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지난 9월부터 11월 중순까지 발굴작업을 벌여 250구의 유골을 수습했지만 이곳에는 발굴해야 할 유골이 수천 구 이상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

1km에 걸쳐 1800~7000명 학살

이곳에는 두 번째 발굴을 끝내고 파란 비닐로 덮어둔 제1학살지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다섯 군데와 오른쪽으로 두 군데를 합쳐 약 1km에 걸쳐 8곳의 학살 현장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골령골 일대를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부른다.

겉보기에 평화롭기만 한 시골 마을인 이곳에는 수천 명의 억울하고 애꿎은 주검들이 묻혀 있다.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 자료집’에 따르면 이곳에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 가입자 등 최소 1800여명에서 최대 7천여명이 세 차례에 걸쳐 집단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 대전 골령골로 끌려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보도연맹원들. © EBS

첫 번째 학살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나흘째 되던 1950년 6월 28일부터 사흘 동안 이뤄졌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여순사건 및 제주4.3사건 관련 수감자와 예비검속으로 체포돼 일시 수감된 보도연맹원, 요시찰 대상자 등이 군경에 끌려와 총살됐다. 이어 그해 7월 3일부터 3일 동안 제주4.3사건 관련 수감자를 비롯한 재소자들이 끌려와 학살됐다.

다음으로 7월 6일부터 17일까지 벌어진 제3차 학살에서는 서울 영등포와 서대문 형무소, 수원형무소에서 가석방돼 열차를 타고 내려오다 대전역에서 연행된 사람들과 공주 청주 형무소의 일반 재소자 및 서산경찰서 보도연맹원들이 끌려와 학살됐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육군무관 에드워드 중령의 1950년 9월 23일 자 보고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에는 ‘서울이 함락되고 난 뒤 형무소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 공산당 우두머리와 좌익극렬분자를 처단한다’는 것이 학살의 명분이라고 기록돼 있다. 희생된 사람들 숫자는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지만 세 차례에 걸쳐 집단학살돼 골령골 일대에 묻혀 있는 유해가 최소 1800구에서 최대 7천여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에 서있는 안내표지판. 산골짝 입구에서 안쪽으로 1km에 걸쳐 여덟 군데에 학살 암매장지가 있다. © 대전시

“누가 집 찾아오면 지금도 가슴 쓸어내린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이름 모를 골짜기에 묻힌 억울한 영혼들은 57년이 지난 2007년에야 진실화해위원회 주도로 이뤄진 유해발굴작업을 통해 34구를 시작으로 계속 발굴돼 세종시 추모의 집 등에 안치됐다. 하지만 발굴한 유해들은 한 구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고 유족들도 찾지 못해 여전히 무연고 사망자로 저승을 떠돌고 있다. 아직도 땅속에 남은 수천 구 유골은 언제 땅 밖으로 나와 안식처를 찾을지 알 수 없다. 유족들은 유족들대로 ‘빨갱이 가족’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지난 70년 세월을 죽은 사람처럼 살아왔다.

”1950년에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셨어요. 그날 후로 70년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세월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라고 하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말도 못 한 채 숨죽이고 한평생을 살았어요”

지난달 20일 골령골에서 열린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 유해발굴 희생자 봉안식’에 참석한 70대 후반 박 아무개 씨는 “지금도 누가 집으로 찾아오면 깜작 놀라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말했다. 열 살이 안 된 나이에 군인들이 집으로 쳐들어와 아버지를 끌고 간 뒤로 모르는 사람만 찾아오면 놀라 숨이 턱 막힌다는 것이다. 박 씨는 ‘빨갱이 자식” 소리를 들으며 살 수 없어 살던 동네를 떠나 평생 타향생활을 해왔다. 아버지 유해라도 찾아야 할 텐데 하면서도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 파리 피카소미술관

그렇게 살아오다 지난 2005년 노무현 정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을 만들고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조사하면서 조심스럽게 아버지 유해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아버지 유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해 아직도 찾지 못한 그는 그동안 정부와 민간단체가 공동으로 진행해온 전국의 민간인 학살지역 발굴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유해를 찾고 있다.

그는 이날 봉안식에서 이름 모를 유골들 앞을 서성이다 함께 온 부인과 함께 유골함 위에 준비해온 술을 뿌리고 두 손을 모았다. 박 씨는 “유골함 중 아버지 것은 없지만, 모든 유골이 아버지 뼈처럼 느껴져 멀리서 왔다”며 “돌아가신 지 70년 만이지만, 발굴된 학살 피해자 모두가 편히 잠드시기 바란다”고 했다. 그는 기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자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묻지 말라”며 “이름 알려졌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하면서 자리를 피했다.

   
▲ 지난 11월 20일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 유해발굴 희생자 봉안식’에서 박 아무개 씨 부부가 유골함 앞에서 술잔을 올리고 있다. © 양수호

장독대 밑에 숨겨두고 본 할아버지 사진

이날 봉안식에 참석한 안원경(66) 씨는 할아버지가 1950년 7월 11일 34살 나이에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총살됐다.

“비료 준다, 농약 준다 해서 보도연맹에 들어갔다고 해요. 시골 사람들이 뭘 알았겠어요. 가난한 시절에 도와준다고 해서 가입서류에 도장을 찍었던 것이 그냥…” 

충북 청주시 오창읍에 살았던 안 씨의 할아버지는 6.25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오창읍 양곡창고에서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당시 군인들은  양곡창고에 기관총을 난사한 뒤 마을 일대를 돌며 창고에서 탈출한 이들을 찾아내 총살했다. 안 씨의 아버지는 그때 충격으로 실어증에 가까울 정도로 말을 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숨어 살았다. 마을에서도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고, 동네 사람들은  안 씨 가족을 피하거나 뒤에서 손가락질했다.

안 씨는 “그렇게 남의 눈을 피해 살면서 아버지가 장독대 밑에 숨겨둔 할아버지 사진을 꺼내 보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나마 숨죽여 살던 동네에서 쫓겨나고 경찰에 잡혀갈까 무서워 할아버지 물건은 전부 다 태워버리고 사진 한 장만 남겨 장독대 밑에 숨겨 두고 한밤에 꺼내 보았다고 한다. 안 씨는 “아버지가 그렇게 숨겨두고 보시던 사진이 어느 날 없어져 난리가 났다”며 “내가 6남매 중 첫째인데 나 말고 할아버지 얼굴을 아는 형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할아버지가 군인들에게 총살당한 것 때문에 안 씨 동생은 군인이었지만, 매번 진급심사에서 낙방했다. 안 씨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숨어 살 듯하면서 할아버지 유해를 찾으려고 조심스럽게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07년 화해진실위원회가 보도연맹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뒤 안 씨가 직접 유해를 찾아 나섰지만 할아버지가 총살당한 오창읍 일대는 도시개발이 진행된 뒤라 유해를 찾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

   
▲ 지난 11월 20일 골령골에서 열린 희생자 봉안식에 참석한 신순란(85) 씨가 유골함을 쓰다듬으며 오열하고 있다. 신 씨는 오빠가 1950년 6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무소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포승줄에 묶여 대문을 넘어서던 장면이 신 씨가 본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다. © 양수호

‘빨갱이 자식’…숨죽이고 살아온 칠십 평생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 유족회' 회장 김복영 (70)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빨갱이 자식’이란 딱지가 붙었다. 충북 충주시 살미면에 살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김 씨 아버지는 1950년 5월 18일 군인들에게 끌려 간 뒤 그해 7월 주검으로 돌아왔다. 김 씨 어머니는 아버지가 학살당한 현장으로 달려가 시신 더미를 헤집고 다니면서 아버지를 찾았다. 대부분 사망자들은 총격으로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어 찾을 수가 없었는데 김 씨 아버지는 당시 24세로 젊은 편이어서 가까스로 유해를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넉 달쯤 지난 그해 11월에 김 씨가 태어났지만 이미 그에게는 ‘빨갱이 자식’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22살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김 씨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다 김 씨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형제자매가 없던 그는 친척집에 얹혀 살면서 힘겨운 세월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동네에서 툭하면 “빨갱이 자식”이라며 구박하고 따돌려 열여섯 살에 홀로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 취직해 케이크 촛대를 만들면서 생업을 이어갔다. 열심히 일해서 자립 기반을 만들고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두고 있는 그는 지금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김복영 회장이 지난 11월 20일 골령골에서 열린 희생자 봉안식에서 추도문을 낭독하고 있다. © 양수호

김 씨는 작년 2월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회장을 맡아 전국의 민간인 학살 발굴 현장을 찾아다니고 있다. 김 씨는 “그동안 정부와 민간 공동으로 경남 진주와 골령골 등 전국에서 9차에 걸쳐 발굴작업을 벌여 많은 유해를 발굴했지만 유족을 찾은 경우는 단 한 구밖에 없다”며 “더 많은 유해발굴과 유족 찾기에 관한 정부와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권의 만행, 보도연맹원 10~20만 학살

‘보도연맹(保導聯盟)’으로 불리는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 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에 조직한 반공교화단체다. 주로 좌익성향 인사들을 가입 시켜 교화한다고 했지만 자발적 의사보다는 경찰의 강압으로 가입하거나 지역 할당제에 따라 멋모르고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무원과 경찰이 지역별로 할당해서 동네 이장이나 면장이 쌀이나 비료 등을 준다면서 가입을 권유해 들어간 농민들도 적지 않아 가입자가 한때 30만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부역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할 가능성이 있다며 경찰과 군을 동원해 전국 각 지역별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학살했다. 유족회와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0만에서 20만에 이르는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돼 전국 각지에 암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과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는 지난달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골령골에서 발견된 유해는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며 “십대도, 여성도 전쟁의 광기를 피하지 못했고 유가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입을 다물어야 했는데,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과거 정권도 현 정권도 골령골 인권평화공원 조성사업에 손을 놓고 있어 준공 예정 시기가 지났는데도 착공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편집 : 양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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