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자라니’

▲ 김현주 기자

나는 ‘자라니’라는 말이 싫다. 이 말은 자전거와 고라니를 합친 말로 뉴스에 나올 만큼 널리 쓰인다. 고라니가 도로에서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 운전자를 놀라게 하는 것처럼 자전거 운전자들이 막무가내로 자전거를 타 자동차 운전자를 위협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인터넷에 고라니를 검색해 보면 ‘고라니가 뺑소니를 치고 도망갔다’라거나 ‘고라니가 차를 쳐서 수리비가 많이 나왔다’는 식의 푸념을 볼 수 있다. ‘자라니’라는 말에는 인간이 고라니를 인식하는 방식이 담겨있다. 인간에게 고라니는 민폐를 끼치는 밉상 동물이다. 

고라니는 ‘자라니’와 다르다. 고라니는 ‘자라니’처럼 교통법규를 위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고라니를 존중하지 않고 자기네 규칙을 어겼다. 국립생태원에서 발행한 <한국 고라니>에 따르면 고라니 주요 폐사 원인은 수렵, 로드킬, 밀렵 등이다. 거의 다 인간에 의한 죽음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매년 10~15만 마리 고라니가 인간 탓에 사라진다고 추정했다. 저자는 고라니를 구조해도 자연으로 되돌려 보낼 공간이 부족한 점도 짚었다. 한국에 도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1㎢마다 1km 정도 도로가 있으니 거의 모든 공간이 도로와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라니를 방생해도 도로에서 치어 죽는 일이 반복된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고라니는 ‘자라니’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게 억울하다.

▲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비 오는 밤 도로 위에서 차량을 앞서 내달리고 있다. 운전자가 속도를 줄여 사고는 나지 않았다. 5월과 11월은 새끼 고라니가 독립하는 시기로 고라니 이동량이 늘어나 로드킬도 늘어난다. Ⓒ KBS

우리가 고라니를 민폐 취급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지극히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은 상징적이다. 인간이 다른 생명보다 뛰어나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태도로는 생명 존중과 자연 보호, 상호의존적 생존을 포함한 생명 사상을 실현할 수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생명 사상의 핵심이 ‘환대’라고 했다. 환대의 핵심은 평등한 관계다. 강자가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똘레랑스와 다르다. 잘난 이가 못난 이에게 하는 건 환대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환대, 자연과 사람 사이 환대가 생명 사상의 요점이다. 

공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일시적 시혜가 아니라 지속적 고민과 환대다. 우리가 자연을 반갑게 맞이하고 정성껏 대하면 자연은 좋은 공기와 물, 흙과 바람으로 우리를 대접한다. 지구와 인간, 자연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 온도는 1℃ 넘게 올랐다. 0.5℃가 더 오르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온다고 한다. 영원히 얼어 있을 거라던 영구동토층이 녹고 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지는 인간의 자연 멸시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되물어야 한다. 진짜 민폐는 누구인가? 고라니인가, 인간인가?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이봉수)

편집 : 김은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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