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만추'

▲ 김은초 기자

솔잎에도 단풍이 든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으레 사시사철 푸를 것이라 여겼지만 잘못 알고 있었다. 마치 우리 부모님과도 같다. 언제나 푸른 줄만 알았던 그들의 인생에 낙엽 지는 계절은 언제 이렇게 성큼 찾아온 걸까. 나이가 서른 언저리에 닿으니 또래들 간에는 부모님 환갑을 어떻게 치렀는지 얘기를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식당에서 친척들을 모시고 밥을 먹었는지, 형제 사이에 돈을 얼마씩 보탰는지부터 얘기는 이어진다. 그리고 대화의 끝은 가슴 밑에서부터 한줄기 한숨을 토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한숨에 담긴 걱정에는 부모의 늙음만 있는 게 아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지 못한 채 여전히 생활을 의탁하고 있는 나 자신의 처지도 거기에 있다. 부모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자식을 거쳐 환갑 잔칫상에 보태졌으니, 따지고 보면 결국 부모님은 당신 스스로 생일상을 차리신 게 아닌가. 우리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은 서른이 다 돼가도록 부모의 품을 떠나지 못한다. 제 밥벌이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이는 차는데, 고용시장은 수년째 매섭게 몰아치는 한파로 얼어붙었다. 올해는 코로나까지 겹쳐 채용 규모는 더욱 쪼그라들었다. 인생의 뜨거운 한여름을 향해 피어야 할 자식들의 계절은 아직 꽃샘추위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설사 자식이 밥벌이를 시작해도, 새 가정을 꾸려 집을 나설 때까지 부모의 역할은 끝나지 않는다. 요즘은 결혼에 앞서 집을 마련하려면, 부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집값이 한없이 치솟은 탓에 우리 세대에서는 신혼부부가 모은 돈만으로 서울지역에 살림을 차리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다른 부모들도 신혼집 장만에 돈을 보태주는 분위기이니, 손 놓고 보기만은 어려운 게 부모 마음일 테다. 자식들이 학교 다닐 때는 사교육비에, 대학 등록금에 돈을 쏟아부었다. 이제 다 키웠나 했더니 신혼집 마련에까지 애를 태운다. 여름에 푸르던 나무들은 가을이 깊어지면 잎을 하나씩 떨구고 홀로 겨울을 난다지만, 우리네 부모들에게 앙상함이란 허락되지 않는다. 여전히 한여름처럼 땀을 흘리길 강요받는다. 늙어서도 끝없이 벌어야 한다.

▲ 부모 인생의 계절에도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인생의 뜨거운 한여름을 향해야 할 자식들의 계절이 꽃샘추위에 잡혀 있는 사이, 부모들은 여전히 자식 건사에 땀흘리길 강요받는다. ⓒ Pixabay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자식의 사회적 삶은 부모에 따라 그 수준이 결정된다는 게 상식처럼 굳어졌다. 뉴스든, 드라마든, 예능 프로그램이든 매일같이 매체에서는 ‘부의 대물림’을 보여준다. 그런 메시지를 접할 때마다 부모 마음은 자식에게 미안함뿐일 테다. 평생 뜨거운 고난의 계절을 보내고, 가을의 선선함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겨울의 문턱에 선 우리 부모들. 올해의 늦가을은 왜 이리 유난히도 추울까. 길가에 선 앙상한 나뭇가지와 나부끼는 낙엽이 바싹 마른 어머니의 손등과 자꾸 겹친다.


편집 : 김은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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