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성 고정관념 깨기: 남자 기자의 원피스 착용기

원피스. 화려한 색감, 화사한 디자인, 일자로 똑 떨어지는 한 벌의 아름다움과 편리함. 옷 자체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기회가 되면 꼭 한 번은 입어보고 싶었다. 어렸을 적 엄마의 코트나 선글라스를 몰래 입거나 끼고 나가 혼난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때마다 엄마는 “너는 왜 남자 애가 여자 옷에 관심이 많아”라며 다그쳤다. 나는 늘 ‘도대체 사람이 입는 옷에 왜 성별 구분이 있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손님, 여기는 여성 의류예요.” 종종 옷을 사러 가면 여성 의류 중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많아 내 발걸음은 여성의류로 향하기도 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어느 날, 한 동료 여기자가 원피스를 입은 것을 보고 ‘원피스를 입으면 시원하고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운 게 문제라면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거나 치마를 입는 건 어떠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원피스는 보기에도 예쁘고 상의와 맞춰 입어야 하는 치마와 달리 한 벌만 입으면 된다. 코디하기도 편하고 여러 가지로 간편한 복장이다. 지난여름 ‘원피스, 나도 한번 입어 볼까’ 하고 지나쳤던 것을 가을에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 보았다. 그런데 실은 “더운데 시원할 것 같아서” “편리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늘 의문을 가져왔던 ‘성 고정관념 깨기’에 관한 도전으로 원피스 착용 체험을 했다. 

남자는 ‘지배적, 독립적, 자기주장적, 경쟁적, 지적, 공격적, 결단적, 논리적’이거나 건강하고 자신감이 넘쳐야 한다. 여자는 ‘수동적, 가정지향적, 주관적, 양육적, 협조적, 온정적, 표현적, 순종적’이어야 한다. 인류가 유사 이래 지금까지 이어온 성에 관한 이런 고정관념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리고 그것을 깨는 것이 어느 정도 힘드는지 직접 체험해 보려고 원피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 거리로 나서 본 것이다.  

남자 원피스 파는 곳 없어 여자 동료에게 빌려

‘원피스 입고 성 고정관념 깨기’는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지난 10월 초순 원피스를 사 입으려고 인터넷 검색창에 ‘원피스’를 검색하니 전부 여성용 옷을 파는 쇼핑몰뿐이었다. 남성용 의류 쇼핑몰에도 원피스를 파는 곳이 있을까 해서 ‘남성용 원피스’를 검색했다. 한 명품 의류 회사에서 300만 원짜리 남성용 원피스를 출시했다는 기사가 있었지만 실제 판매처는 알 수 없었다. 남성용 의류를 파는 쇼핑몰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점프 수트(상의와 바지가 하나로 연결된 옷)만 나올 뿐 원피스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동료 여기자 둘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기사를 쓰려는데 원피스 좀 빌려줄 수 있어?” 두 사람 모두 흔쾌히 자기 원피스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지난 8일 오전, 원피스를 빌리긴 했는데 이제 내 마음속에 있던 성 고정관념이 강하게 나를 압박했다. 빨갛고 알록달록한 꽃무늬 원피스는 눈에 너무 띄어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무채색에 가까운 검정색 원피스를 빌려 입었다. 입는 게 뭐 대수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막상 입으려고 하니 망설여졌다. 하지만 바로 수업이 있어 더 고민할 새도 없이 화장실에서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오전 9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4층 강의실로 들어서자 담당 교수가 내 모습을 보고 “오”라고 짧게 감탄사를 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정확한 표정은 읽기 어려웠지만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 학생들 시선도 일제히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말로는 “이해한다” 내심으론 “뭐하는 거지?”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이 끝나자 눈치 빠른 한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뭐야? 기사 쓰는 거야?” 다른 학생들의 반응과 말들도 다양하게 쏟아졌다. 

▲ 원피스 체험을 시작한 지난 8일 세명대 학술관 앞에서 부끄러운 듯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 조한주

“옷 뭐야? 튜닉(고대 유럽에서부터 입던 무릎 정도까지 내려오는 느슨한 의복)이야? 로마시대 사람 같아”, “게임 벌칙 중이야?”, “잘 어울린다”… 겉으로는 이해하는 듯한 반응들을 보였지만 눈빛은 “이게 뭐야,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들을 하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동료들의 그런 속내는 얼마 안 있어 바로 드러났다. 점심을 먹으러 학생회관 식당으로 들어서자 평소 늘 함께 식당으로 가던 동료 기자가 내 옷차림이 신경 쓰이는 듯 “형, 거리두기 하자”며 슬쩍 떨어졌다. 원피스를 입은 나에게 쏠리는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는 “사람 없는 시간에 빨리 와서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식사를 하고 저널리즘스쿨 건물로 돌아오자 수업시간에 못 본 동료들이 “어” “오” 하더니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패션의 혁명’, ‘멋있다’, ‘잘 어울린다’며 긍정적 언급을 하지만 내심은 놀랍고 당혹스럽다는 것이 본심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원피스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보러 오는 동료도 있었다. 한 교수는 아예 내놓고 “얘는 왜 치마를 입고 있어”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건물 입구에서 방역 근무를 하던 학교 직원은 내가 지나갈 때는 의아한 표정만 짓고 아무 말도 않다가 뒤에 따라 들어오던 동료 기자에게 “남자분이 왜 긴 원피스를 입고 다니시는 거예요”라며 걱정스럽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체험 기사를 쓰려고 그런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직원은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학교 안을 다닐 때는 모르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면서 “뭐야? 정상이 아닌 거 아냐” 하며 수근대는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따가운 시선을 피하려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매일 지내는 공간인 학교 캠퍼스에서 원피스를 입고 하루를 보내보니 그 어느 날보다도 진땀 나고 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피스를 입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체험 첫날 학교에서부터 너무 많은 관심을 받자 원피스 체험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들로부터 “남자가 왜 여자 원피스를 입어”하는 강한 성 고정관념을 직접 절감했고, 내 안에서도 스스로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한 하루였다. 성 고정관념을 깨 보겠다는 의지로 원피스를 입고 하루를 지냈을 뿐 실제 내 마음과 몸은 오래된 강력한 성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차에서 겪은 ‘모세의 기적’···어색함 넘어 스트레스로 

▲ 지난 9일 오전, 망설임 끝에 원피스를 입고 제천에서 남양주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 김계범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제천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해 대합실에 잠시 앉으려고 자리를 찾았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슬쩍 옆을 돌아보니 한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대합실 의자에 앉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힐끗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딴 자리로 옮겨 간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에 올랐다. 열차에 타고 내 자리로 가는 동안 일부 승객이 흘깃흘깃 보는 것 말고는 별일 없이 원주역까지 갔다. 그곳에서 탄 할머니가 자리를 못 찾아 나에게 와서 “68번 좌석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의 승차표를 보니 68번이 아니라 6B로 내 자리 16A보다 열 칸 앞이라 그리로 안내해 주고 돌아왔다.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열차 안 승객들이 멈칫 하는 표정으로 뒤로 피하듯 상반신을 약간 뒤로 젖히며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시선을 나에게 집중하며 몸은 뒤로 젖히는 승객들 모습에서 성서에 나오는 모세가 바닷물을 가르고 건너가는 장면이 떠 올랐다. 남자가 여자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런 당신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 같았다. 모르는 척 앞만 보며 내자리로 돌아왔지만 어색함을 넘어 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촉기인

남양주로 가기 위해 양평역에서 내려 경의중앙선 열차로 갈아타고 자리에 앉자 맞은편 승객들이 전부 나만 쳐다봤다. 스마트폰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고, 내 앞 줄에 앉은 여성은 나를 한참 훑어보더니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나는 그곳에서 ‘불가촉기인(不可觸奇人)’ 곧, 접촉해서는 안 되는 기인이 돼 있었다. 집(남양주)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쩌지’, ‘부모님은 뭐라고 하실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성 고정관념 깨기를 한다 해놓고는 숱한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으로 나 스스로 움츠러들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기차역에서 집까지는 앞만 보고 서둘러 달려갔다.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문 앞에 잠시 머뭇거렸다. 집에 온다는 말을 하지 않고 온 터라 부모님은 내가 오는지도 모르는 데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부모님이 외출하고 없기를 바라는 생각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TV를 보던 어머니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뭐야? 왜 원피스를 입고 있어?”
“엄마, 그게……”
“갈수록 태산이네. 쓸 데 없는 짓을 하고 있어.”
 

어머니가 뭔가 나무라는 듯한 말을 이어가려는데 아버지가 불쑥 거들고 나섰다. 

“기사 쓰는구나.” 

아버지 역시 눈빛에서 당황스러움이 묻어났지만 짐짓 이해하고 감싸주려는 모습을 보였다. 

“기사 쓴다고 하잖아. 왜 그래.” 
“괜히 아는 사람 만나서 ‘쟤 멀쩡하다가 왜 저렇게 됐지’ 그런 소리라도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나를 따로 불러 용돈 5만원을 쥐어 주며 “아들, 고생이 많아”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로 그런 것’이라며 이해해 주려는 듯했고 어머니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선 반응을 보였지만 모두 성 고정관념에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남성은 ‘자기 주장적, 합리적, 유능함’ 같은 ‘수단적 특성’을 갖는다는 성 고정관념에, 어머니는 여성은 ‘온화함, 민감함, 타인을 잘 보살피는 특성’을 갖는다는 성 고정관념에 입각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편하고 통풍 잘 돼···원피스 입고 강남을 누비다

지난 9일 오후 원피스 한 벌을 직접 사기 위해 빌려 입은 원피스를 입고 강남역으로 갔다.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고 잠실역까지 갔는데 앞쪽으로만 향해 있는 좌석 배치 때문인지 버스 안에서는 원피스를 입은 걸 눈치채지 못한 건지 별로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버스에서 내린 뒤부터였다.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내려가자 맞은편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 쳐다본다. 강남역으로 가는 지하철 열차에 몸을 싣자 많은 이들이 나를 쳐다본다. 기분 나쁜 시선들도 있었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를 향했던 눈빛들은 금세 스마트폰으로 옮겨갔다. 열차에서 내려 지하상가를 둘러봤다. 원피스를 파는 가게들이 종종 보였는데 보통 작은 가게들이고 손님이 있어도 여성뿐이어서 차마 들어서지 못했다. 

▲ 지난 9일, 강남역 인근 ‘강남스타일 말춤 스테이지’에서 원피스 차림으로 사진을 찍었다. 서 있기만 했는데 지나가는 이들의 많은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 김준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옷가게로 가서 편하게 옷을 고르기로 하고 다른 가게를 찾아 나섰다. 휴일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이 많아 그런지 딱히 나를 쳐다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들 제 갈 길이 바빠 보인다. 바람 부는 날씨에 조금 빨리 걷자 원피스가 펄럭거린다. 통풍이 잘 돼 시원했다. 땀을 많이 흘리는 내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온 몸으로 바람을 맞는 느낌이었다. 원피스 밑자락을 펄럭이며 한참을 걷자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더해져 많은 시선들이 나를 향했다. 

▲ 지난 9일 서울 강남 한 대형 의류매장으로 들어가 여성복 코너에서 원피스를 고르고 있다. © 김준범

쏠린 시선에 입어 보지도 못하고 산 원피스

한 대형 의류매장으로 들어갔다. 다양한 종류의 원피스가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나 단정하고 깔끔한 원피스를 선택하고 싶었다. 옷을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막상 옷을 입어보고 사려고 하자 망설여졌다. 한 시간 넘게 매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결국 이것저것 고르다 그나마 무난해 보이는 디자인과 색의 원피스를 한 벌 골랐다. 가격도 만만치 않아 한 번 입어보고 사고 싶었지만 옷을 고르는 내내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기에 입어보는 것은 포기했다. 따라간 동생은 한 점원이 계속 나를 수상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쳐다본다고 말했다.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훑어보면서 이상하게 쳐다보는 한 남성도 있었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얼른 옷을 사서 나와야 되겠다는 마음에 옷값 4만7천원을 치르고 서둘러 빠져 나왔다. 

▲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무난한 디자인의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원피스를 골랐다. © 김계범

“야 봤어?” 

“남자야, 푸하하.”

옷가게에서 나와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서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를 보고 지나가더니 다 들리게 내 옷을 가지고 얘기를 하는 거였다. 누가 봐도 남자가 원피스를 입은 게 범상한 모습은 아니겠지만 불쾌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다 나왔다. 두 시간 동안 있었는데 다들 자기 일을 하기 바빠서인지 아무도 나를 쳐다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카페에 나와 다시 거리를 걷자 밀려오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쩔 수 없었다. 복잡한 거리보다 대형 빌딩 뒤편의 한적한 거리를 걸을 때 오히려 사람들 시선이 더 나를 향하는 듯했다. 낯선 이들의 시선은 부담스러웠다. 또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대화 소재 삼아 이야기 하는 것을 내 귀로 직접 듣는 것은 불쾌한 경험이었다. 

나흘간 원피스 체험···붉은색 원피스 입자 시선 작렬 

“요즘 이런 게 인기야?” 
“못 본 사이에 정체성 바뀐 거야? 수술했어?”
“바지가 왜 트여있어? 치마입고 왔어?”

원피스를 입은 지 사흘째 되던 날, 동네 친구들 모임에 원피스를 입고 나갔다. 다들 깜짝 놀란다. 기사를 쓴다고 하니 그제야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사흘간 짧은 원피스 체험 이후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원피스를 이야기했다. 몇몇 교수들도 ‘이제 원피스 안 입냐’고 말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딱 하루만 입은 것을 감안할 때 생각보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계획대로면 사흘만 체험하고 마치려고 했다. 아쉬움이 남아 하루 더 체험했다. 

▲ 지난 24일, 잠실역 지하상가 한 옷 가게에서 원피스를 고르고 있다. © 김준범

지난 24일 오후, 원피스를 한 벌 더 사기 위해 잠실역 지하상가 옷가게에 갔다. 나도 모르게 검정색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가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려 밝은 색 계열 화려한 옷을 찾기 시작했다. 옷을 찾고 있자 가게 주인이 “누가 입으려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내가 입을 옷을 찾고 있다고 하니 “혹시 연극해요?”라고 묻는다.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입는 귀여운 스타일이라며 원피스 한 벌을 권해주었다. 몇 가지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두고 이 옷 저 옷 들었다 놨다 몇 차례 반복했다. 10여 분을 고민한 끝에 한 벌을 골랐다. 할인해서 1만5000원.  

▲ 석촌 호수 수변데크에서 원피스를 입고 사진을 찍자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 나를 쳐다봤다. © 김준범

새로 산 원피스를 잠실역 화장실에서 갈아입었다. 따라온 동생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두 번째 봤지만 여전히 어색하다고 했다. 새 옷도 샀고 걸어 다닐 생각으로 석촌호수로 향했다. 확실히 붉은색 계열 원피스를 입고 다니니 시선이 전보다 훨씬 많이 쏠렸다.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는 건 물론 뒤를 돌아보면서까지 쳐다보는 사람도 많았다.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었다.  

▲ 예쁜 원피스를 입고 호숫가를 거닐며 깊어 가는 가을 정취를 느껴보았다(위). 원피스를 입고 2.5km 호수를 한 바퀴 걷자 조금 추워 라이더 자켓을 걸쳤다(아래). © 김준범

호수가를 걷다가 근처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지난번 카페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면에서 식사를 하며 나를 보던 한 사람은 내 옷차림이 불쾌하다는 듯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앞 사람에게 무언가 수군댔다.  

▲ 잠실역 근처 한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나를 쳐다보는 시선들이 계속 느껴졌다. © 김준범

집으로 돌아와 나흘의 원피스 착용 체험을 되돌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집중했는데, 여성보다는 남성들이 대체로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 같다. “남자가 왜 여자 원피스를 입어”라는 성 고정관념에 빠진 남성들이 ‘남성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나 일탈이 기분 나쁘다는 그런 반응들이었던 것 같다.  

성 고정관념 깨고 양성평등사회로 가야

성 고정관념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오랫동안 공유해온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요인이든 사회환경적 영향이든 어느 사회에나 성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우리나라 일부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치마 아닌 바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8월에는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여학생이 교복을 선택할 때 치마 또는 바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권고했다. 그런데 여전히 남학생들은 바지 말고는 선택권이 없다. 

영국, 뉴질랜드, 일본의 일부 학교에서는 남학생도 치마를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례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남자가 치마나 원피스를 입는 것, 화장하는 것 등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 고정관념이 강하고 특히 남성들이 가부장적 권위까지 가미한 강력한 성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는 방증이다.    

원피스 체험에 관한 남녀 동료들 반응도 미묘하게 차이를 보였다. <단비뉴스> 여기자 이예슬(27) 씨는 “어색한 건 잠깐이고 걱정이 됐다”며 “원피스를 입고 수업에 들어가고 취재를 하려면 힘들 텐데 무슨 말을 듣고 다닐까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반면 남자 동료인 이동민(26) 씨는 “평소 보던 모습과 달라 적응이 안됐다”며 “원피스가 여성이 입는 옷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있는데 남자가 입은 걸 보니 같이 걸어 갈 때 창피했다”고 말했다. 여성 동료는 걱정을 하는 반면 남자 동료는 창피했다며 자기 체면 같은 것을 먼저 챙겼다.

▲ 26일 오후, 세명대학교 민송도서관 앞에서 원피스 체험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촬영을 했다. © 김태형

의복은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살다 보면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게 무수히 많다.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을 것인지만큼은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한 남자 연예인이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 치마를 입고 나왔다. ‘여고생 같은 상큼함’, ‘선을 넘은 패션’ 등 기사 제목들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다양성을 존중하고 양성평등이 이뤄지는 세상으로 가려면 옷차림과 같은 작은 일상 영역에서부터 성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열린 자세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비록 이번에는 사흘 만에 원피스 입기를 멈췄지만 앞으로는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당당하게 자주 원피스를 입고 싶다.      


편집 : 윤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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