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재단법인 와글 이진순 이사장

“(청년이) 정치의 주인이 돼야죠, 구경꾼 말고. 정치를 혐오하거나 냉소해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동안 많이 체험해서 깨닫게 된 부분인 것 같아요. 저는 정치에 대한 혐오나 냉소가 꼭 유권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계속 그렇게 만드는 정치 환경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정치가 멀리 국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정치와 무관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내가 직면한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발언하고 제안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는 활동들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시민이 만드는,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공익재단 와글(WAGL)의 이진순(57) 이사장이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정치를 직업 정치인에게만 맡기지 말고,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자고 주장하는 그를 지난 5월 29일 와글 사무실이 있는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 건물의 카페에서 만나고, 11일 전화와 이메일로 추가 인터뷰했다. 여러 소셜벤처(사회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기업)가 공유 사무실을 쓰는 건물답게, 카페는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회의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 이사장은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 중인데 인터뷰를 하러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왔다”며 미소를 지었다.

시민 목소리 담아내는 풀뿌리 정치 실험실 ‘와글’ 

▲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 10층 카페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는 이진순 와글 이사장. ⓒ 이예슬

이 이사장은 10여 년간 문화방송(MBC)에서 작가로 일하다 불혹의 나이에 미국 럿거스대로 유학,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고 2009년부터 올드도미니언대학 교수로 시민저널리즘 등을 강의했다. 새로운 정치 시민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귀국한 후 2015년 ‘와글와글한 군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실험을 한다’는 취지의 풀뿌리 정치 실험실 와글을 만들었다. 영어 약자 WAGL은 ‘We All Govern Lab’의 앞글자를 따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주요 사업은 차세대 정치리더 발굴·지원, 수평적 의사결정을 위한 시민 참여 온라인 플랫폼 연구·운영 등이다. 전문가나 직업 정치인이 독점하는 정치 대신, 문제를 가장 잘 아는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 발언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정치를 지향한다고 이 이사장은 설명했다. 

“와글에서 하는 일들이 전부 정답은 아닐 거예요. 그런데 정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해법들의 범주가 넓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일이 얼마나 다양한데 열쇠 하나로 다 풀 수 있겠어요? 열쇠가 다양할수록 좋을 텐데, 우리는 그 열쇠의 숫자를 늘리는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 경우에 부딪혔을 때 선택할 수 있는 해법의 옵션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온라인 시민입법 플랫폼 ‘국회톡톡’ 3개 법안 성사 

와글의 실험 중 대표적 사례는 ‘국회톡톡’이다. 일반 시민들이 국회에 입법 제안을 할 수 있도록, 2016년 온라인 시민입법 플랫폼을 만들었다. 국회톡톡 사이트에서 시민이 입법 제안을 올리고 1000명 넘는 시민의 지지를 받으면 와글이 관련 상임위원회에 메일을 보내 응답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2주 안에 관심을 보이는 국회의원이 나타나 ‘매칭’이 이뤄지면 온·오프라인에서 국회의원과 시민이 소통하며 입법의 전 과정을 공유한다. 매칭 기간인 2주간 국회의원들의 참여·거부·무응답 내역이 국회톡톡을 통해 실시간으로 공개된다. 여기에 28만3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고, 10건의 법안이 매칭됐으며, 최종적으로 3개 법안이 제정됐다.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오제세 의원과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주도한 ‘15세 이하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법’과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주도한 ‘신입사원 연차 보장법’,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주도한 ‘표준이력서 법제화’ 등이 해당 법안이다. 시민들이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든 국회톡톡은 지난 1월 국회에 ‘국민동의청원’ 사이트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서비스를 종료했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시민의 입법 제안에 10만 명이 동의하면 국회 소관위원회 및 관련위원회로 회부돼 심사를 받고, 채택되면 본회의에 상정되는 방식이다. 

이 이사장은 국회톡톡을 돌아보며 “문제를 직접 겪는 시민들이 그 사안에 대해 가장 잘 안다는 ‘당사자성’에 기반해서 입법 제안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치인과 소수 전문가에 의한 입법 과정의 독점을 깨뜨리고, 정치에 관한 냉소와 혐오를 극복할 정치적 효능감을 시민들과 나누고 싶었다는 얘기다.

▲ 와글이 2016년 시작한 온라인 시민입법 플랫폼 국회톡톡. 시민들이 '신입사원 연차 보장법' 등 다양한 제도를 입법 제안해 3개 법안이 성사됐다. ⓒ 국회톡톡

국회톡톡은 서구 여러 나라에 먼저 등장한 온라인 시민참여 플랫폼을 참고했다고 이 이사장은 설명했다. 뉴질랜드의 온라인 공론장 ‘루미오(Loomio)’는 2011년 미국의 월가점령시위를 계기로 수도 웰링턴에 모인 이들이 연대와 토론을 위해 만든 웹사이트다. 루미오를 통해 시민들은 안건에 관한 찬성, 보류, 반대, 차단 버튼과 코멘트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는 온라인 시민참여 플랫폼인 ‘디사이드 마드리드(Decide Madrid)’를 운영한다. 시민들은 이 플랫폼을 통해 제안, 토론, 투표 뿐 아니라 시민 참여 예산의 쓰임새까지 결정한다.

삶의 현장에 있는 ‘당사자’가 정치 주체 되어야

이 이사장이 온라인 플랫폼 외에 현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사자 정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차세대 리더(지도자)를 지원하고 발굴하는 일이라고 한다. 청년들은 기후 위기와 젠더(성별) 갈등 등 앞으로 더 심각해질 문제에 직면할 당사자이므로 적극적인 해결 주체로 나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앞으로 길어야 30년쯤 더 살겠지만, 지금 청년들은 삶이 그 두 배보다 더 많이 남았어요. 당연히 이 지구에 더 오래 살 ‘장기 투숙자’들의 의사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중요한 거죠. 기후 위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얼마나 자주 돌지 등은 기대 여명이 훨씬 긴 현재의 청년 세대가 고민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청년들을 대표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작기 때문에 청년 리더를 지원해서 성장을 위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양분을 제공하고 싶어요.” 

청년 정치인 발굴을 위해 와글은 꾸준히 리더십 캠프를 열고 있다. 2018년 지방선거에 리더십 캠프 참가자 7명이 출마해서 3명이 경기도 도의원, 전주시 시의원, 대전 유성구 구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이 이사장은 “청년들이 특히 지방선거에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방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가 낮고, 다선의원이 계속 당선되는 기득권 구조가 중앙보다 공고하기 때문이다.

▲ 2018년 여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등에서 열린 와글의 디지털민주주의 국회연수과정. 20명의 청년들이 5일간 '입법과정의 이해' 등 강의를 들으며 더 나은 정치에 관해 고민했다. ⓒ 와글 페이스북

정치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 당선돼 일하면서 새로운 눈으로 의회와 행정, 주민들의 삶을 배우면 국민들은 ‘청년들이 정치하니까 훨씬 많은 일들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 이사장은 2022년 지방선거에 대비해 내년에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방선거 아카데미를 열 계획이다. 그는 “관심 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지방 의회 의원으로서 필요한 소양을 익힐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청년들이 주체적인 정치 감수성을 키울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대의민주주의 한계 부닥친 한국 정치, 혁신 절실 

그는 지금 우리 정치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부닥쳐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대의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선출된 대표자가 국민의 의견을 대변해야 하는데, 지금 국회는 연령과 지역, 성별, 계층에 따른 다양한 이해관계를 비례해서 대의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원 대부분이 고학력 남성이고, 지역구 의원 중에는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다가 선거 때만 잠시 와서 연고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다양한 삶의 현장에 있는 국민들의 절실한 요구를 체감하고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이 이사장은 “이러한 우리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이번에 (국회의원)선거법을 개정한 것인데 오히려 현실은 더 나빠졌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준연동형비례제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소수 정당은 원내에 진입하기 힘들고, 거대 정당의 의석수가 더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존 정치인이 일반 정치 신인보다 훨씬 유리한 구조”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다음 선거부터는 비례위성정당이 용인돼서는 안 된다”며 “21대 국회가 이번 총선의 한계를 인정하고 파행적 선거법 운용의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당 내 민주주의로 대의제를 혁신하고’ ‘직접민주주의 도입으로 대의제를 보완하는’ 투트랙(2개 노선)의 정치혁신을 제안한다. 이 이사장은 대의제를 개선하려면 일단 정당 내 민주주의가 확립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누가 당대표고 공천권을 가졌는지에 따라 하향식으로 결정되는 의사구조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당원들이 토론을 거쳐 당론을 결정해야 하며, 지역 단위에 뿌리박고 있는 정당 조직이 당사자인 주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의견을 듣고 상부로 전달하는 상향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정치 현실은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바뀐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죠. 어떻게 정치를 하는가, 그 방법의 변화가 정치혁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우리는 ‘정치의 문법을 바꾼다’고 표현해요.”

학생운동·노동운동 거쳐 정치개혁 나선 도전자

▲ 이진순 이사장이 정당과 인물을 바꾸는 것보다 '정치의 문법'을 바꾸는 것이 절실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 이예슬

이 이사장은 서울대 재학 시절 총여학생회장으로서 전두환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했고, 한때 공단에 취업해 노동운동도 했다. 방송작가, 교수, 시민운동가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2013년부터 5년간 <한겨레> 토요판에 ‘이진순의 열림’을 연재하며 122명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늘 개척하고 변화하는 길을 걸어온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나도 사람인지라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다가 결과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한다”며 회의감에 빠질 때마다 떠올린다는 고 신영복 선생의 인터뷰 발언을 들려줬다.  

“변화는 그렇게 빨리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변화는 죽을 때까지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분명히 변화하는 방향으로 간다. 그건 확실하다.”

이 이사장은 느리지만 반드시 올 변화를 기대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기쁨을 삶의 활력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끝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이 내 팔자인 것 같다”며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과 나도 그 변화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앞으로도 도전과 실패를 반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 : 양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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