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소통'의 실마리를 찾는 법

▲ 신현우 PD

할아버지와 아빠가 또 싸우기 시작한다. 아빠는 얼굴이 벌게져서 언성을 높인다. ‘너희가 뭘 아느냐’는 할아버지 대꾸가 아빠의 화를 더 돋군다. 결말은 언제나 똑같다. 아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나머지 가족은 한숨만 쉬며 식사를 이어간다.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사는 할아버지와 ‘이명박근혜’를 증오하는 아빠의 치열한 전투, 즐거워야 할 식사는 항상 파탄이 난다.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처음에는 고모가 나섰다. 먼저 떠나신 할머니처럼 둘 다 그만하라고 타일렀다. 전혀 효과가 없었다. 할아버지를 제압하던 할머니의 카리스마가 고모에겐 없었다. 식사 전 아빠에게 대꾸하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아빠는 항상 참겠다고 약속했지만,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 해결사 역할이 돌고 돌아 나에게 왔다. 유일한 손자의 말은 할아버지가 들어주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큰소리를 쳤다. “저만 믿으세요.” 

▲ 가족이 모여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금물'일까. ⓒ Pixabay

나는 정치 이야기를 막아 보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입을 열면 맞장구치는 척하면서 다른 이야기로 유도했다. “맞아요 맞아요. 진짜 문제죠. 할아버지 요즘에는 기원 안 나가세요?” 통한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기원 이야기를 했다. 아주 잠깐이었다. 할아버지는 금세 대화 주제를 대통령으로 돌려놨다. 그리고 아빠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 달에는 설득을 해봤다. 식사 전 가족 모두가 모여 있을 때, 할아버지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설득했다. “할아버지 정치 말고 저희 다른 이야기해요. 이번에 혜선이 승진도 했는데…….” 

할아버지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식사와 함께 시작된 동생의 승진 이야기는 금세 자유대한민국과 공산주의로 바뀌었다. 아빠는 또다시 화를 냈다. 슬슬 약이 올랐다. 큰소리쳐 놓은 게 있어서 못하겠다고 말하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고민 끝에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 이름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전략. 식사 전 고모와 엄마와 동생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대답만 잘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할아버지는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포퓰리즘 독재 이야기를 꺼냈다. 공산주의와 퍼주기 이야기가 시작됐다. 아빠가 대꾸하려는 순간, 나는 바로 할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미친 척하고 진행을 시작했다. “맞아요, 할아버지. 요즘 긴급재난지원금 말이 많더라고요. 이번에는 고모 의견 들어볼까요?” 

고모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황한 건 할아버지와 아빠였다. 제압된 기선을 이어갔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그런 의견도 많더라고요.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는 식사를 하며 의견을 나눴다. 긴급재난지원금에 관한 고모와 엄마의 의견이 다른 것도 행운이었다. 고모와 엄마는 자연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동생은 양쪽 의견을 보완하며 자기 생각을 말했다. 치열하지만 차분한 토론이 이어지자 할아버지와 아빠는 낄 자리가 없었다. 발언권을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같은 말만 반복하니 더 할 말이 없었을 뿐이다. “아빠, 발목만 잡는 야당, 그거 아까 하신 말씀이잖아요. 다른 주장은 없으세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작전은 성공이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식사를 즐겼다. 평소만큼 말을 많이 하지 못한 할아버지는 아쉬운 눈치였다. 식사를 마칠 무렵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다음 달에는 무슨 이야기 할까요? 개천절 집회 어떠세요?” 할아버지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됐다, 됐어. 손이나 씻자.” 고모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엄지를 추켜세웠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왜요. 할아버지, 그럼 코로나 독재 할까요? 다음 달에도 재미있게 이야기해요…….”


편집 : 오동욱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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