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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가 될 리 없다’ 여겨 빚어진 비극

기사승인 2020.09.19  14: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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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akimmin37@naver.com

- [역지사지] ‘차별과 폭력’

   
▲ 김정민 기자

흑인 여성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SF소설 <킨>은 굉장히 흥미롭다. 주인공 다나는 1976년을 살아가는 흑인 여성이지만 100년 전 조상인 백인 루퍼트의 목숨이 위험해질 때마다 과거로 끌려가 그를 구하는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그녀가 도달한 곳은 1876년의 메릴랜드주로 흑인이 인간이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되는 곳이다.

<킨>에는 백인들에게 매 맞고, 강간당하고, 팔려가고, 살해당하는 당시 메릴랜드주의 흑인들 이야기가 나온다. 아내를 강간하려는 백인 남성을 피해 도망쳤다는 이유로 도망 노예로 낙인 찍혀 채찍으로 맞고 귀가 잘리고, 개한테 물리고 찢기고 씹히는 흑인 남성 이야기나, 뱃속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릴 때까지’ 선 채로 묶여 채찍을 맞는 흑인 여성 이야기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지나간다. 참혹한 서사다. 

역설적이었던 점은 인간이 인간에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이토록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이 ‘무덤덤함’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당황스럽지만 이날 내가 느낀 감정을 더듬어보면서 ‘당사자가 될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상태’에서는 타자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불현듯 이해했다. 나는 아시아 국가 한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살며 주류로서 삶을 향유했기 때문에 메릴랜드 주의 흑인과 정서적 거리감을 느꼈고 나 자신은 그런 가혹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당사자가 될 가능성이 0에 수렴할 때 진심으로 공감하며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역지사지’의 태도는 희미해진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방관하는 태도의 밑바닥에는 불의를 대하는 무감각함이 깔려 있고 그것은 ‘당사자가 될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상태’에서 비롯된다. 데릭 쇼빈이 조지 플로이드를 숨지게 하는 동안 4명의 다른 백인 경관이 방관자가 된 이유 또한 그들이 백인 경찰에게 우악스럽게 억눌려 고통을 호소하는 흑인남성에게 자신들을 대입할 수 없었기 때문일 터다.

공리주의를 주창한 제레미 벤담은 구빈원을 만들어 거리에서 구걸하는 빈자들을 격리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다수의 쾌락을 위해 소수를 거리낌없이 희생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벤담은 당연히 빈자 편에서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폭력과 불의는 ‘역지사지’의 부재 속에서 잉태된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거리낌없이 타자화하고 학대할 수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역지사지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정의는 자취를 감추고 불의와 폭력만이 난무할 것이다. ⓒ Unsplash

공간의 분리는 위계를 전제한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의 거주가능지역을 제한한 것도, 조선시대 내외법이 여성의 공간을 집 안으로 한정한 것도, 로자 파크스가 권리를 주장하기 전까지 백인과 흑인의 버스 좌석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도. 모두 ‘다수’를 차지한 기득권 집단이 소수자 집단에게 강요하는 불의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벤담의 정의가 사회 곳곳에서 통용되는 모습을 본다. 다수가 소수에게, 주류가 소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조직적으로 묵인하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 왜 어른과 아이의 공간을 분리하는 ‘노키즈존’이 만들어졌는가? 아이들이 시끄럽고 소란스러우니 다수 어른의 행복을 위해 공공장소 출입을 제한하자는 것이다. 쫓겨난 아이들은 사회적 환대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우리사회의 무관용과 차별, 혐오를 학습하고 내면화한 채 자라게 될 것이다. 이 역시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철학자 존 롤스는 벤담의 정의를 비판하며 스스로가 당사자가 될 가능성을 고려해 규칙을 세우는 것이 정의롭다고 지적한다. 롤스가 말하는 정의가 바로 ‘역지사지’의 정의다. 기독교의 황금률과도 통한다. 너 자신이라면 그렇게 대우하겠느냐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당사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은 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의를 감지하고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역지사지의 감수성, 곧 공감능력을 길러야 한다. 공감능력은 상대와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며 상대가 나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는 데서 길러진다. 집단의 동질성을 강화하고 다양성을 질식시키는 공간의 분리는 공감능력을 퇴보시킬 뿐이다. 빈자를 구빈원으로 격리하지 말고, 아이를 공공장소에서 쫓아내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2019년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을 탄 할리우드의 동양인 배우 ‘산드라 오’는 20년 전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에 만연한 인종차별을 비판하며 “다인종 배우자를 곁에 둔 백인의 경우는 세계관을 확장시킬 수 있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로 주변을 채울 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과 일상 속에서 교류하고 소통할 때 비로소 경직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역지사지를 실천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한국이 극심한 갈등사회가 된 것은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발상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좌우, 여야, 노사, 세대, 계층, 지역, 환경 등 서로 간 갈등 국면에는 대개 인간, 특히 강자나 기득권층의 자기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간이 넓어져야 할 때입니다. 그런 생각과 풍자가 떠오르는 이는 누구나 글을 보내주세요. 첨삭하고 때로는 내 생각을 보태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봉수 교수)

편집: 김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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