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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가꾸는 ‘마음의 텃밭’

기사승인 2020.09.11  15: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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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 기자 sinsy77@naver.com

- [상상사전] ‘공간’

   
▲ 신수용 기자

아빠가 변했다. 파김치, 배추김치 등 온갖 김치를 담근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빠는 절대로 부엌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잘 차린 밥상을 받던 아빠가 요리를 했다. 한식 자격증을 따겠다며 공부도 했다. 시험은 떨어졌지만, 아빠의 도전은 이어졌다. 반찬 한 점, 국 한 모금만 입안에 넣어도 아빠의 솜씨임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모들이 아빠가 만든 김치와 밑반찬을 가져갔다.

아빠가 부엌에 머물게 된 건 식구들이 식탁에서 사라지면서다. 엄마의 변신도 큰 몫을 했다.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던 엄마가 모임에도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고 해외여행도 간다. 무릎 연골이 닳도록 전국의 산에도 오른다. 엄마는 잘 닦인 트래킹 코스를 좋아하지만, 아빠는 남들이 잘 안 다니는 산길을 간다. 자식들은 학교와 회사에서 밤늦게 집에 돌아와 아침 일찍 증발한다. 주말에는 각자 친구들 만나러 나가기 바쁘다.

   
▲ '슈필라움’(spielraum)이란 독일어가 있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말이다. 우리말에는 없지만 '놀이방'에 가깝다. 슈필라움은 놀이 공간보다 내가 마음껏 무엇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 언스플래시

이번엔 거실이었다. 아빠의 활동 구역이 바뀌었다. 어느 날 귀가하니 현관 입구에 집채만한 장식장이 서 있었다. 창고에 있던 소파도 거실로 나와 있었다. 제사용 제기, 놋그릇, 꽹과리 같은 골동품으로 장식장 안이 꽉 찼다. 엄마와 자식들은 남이 쓰던 그릇이 싫다며 질색했다. 아빠 혼자 놋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는다. 작은 거실에 어울리지 않는 큰 TV도 함께 거실로 나왔다. 소파와 TV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눈이 아프다. 축구 경기나 영화도 아니고 <나는 자연인이다>를 항상 켜 둔다. 엄마는 안방에서 드라마를, 자식들은 컴퓨터로 예능을 본다.   

아빠를 보면 '슈필라움’(spielraum)이란 독일어가 떠오른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말이다. 우리말에는 없지만 '놀이방'에 가깝다. 슈필라움은 놀이 공간보다 주로 내가 마음껏 무엇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물리적 조건뿐 아니라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되는 공간을 뜻한다. 가족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평생 땀 흘렸지만, 정작 자신만의 취향과 이를 가꿀 공간이 없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던 아빠의 책들은 내 책장 가장 구석진 귀퉁이에 꽂혀 있다. 

슈필라움의 부재는 우리 아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보다 아빠가 더 고독해 보인다. 대개 여성들은 여러 사람을 만나 수다를 떨며 외로움을 퍼내고 다양한 사회적 공간을 찾아낸다. 중년 남성은 다르다. 그간 사회생활의 부대낌과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는 성 역할에서 벗어나 아빠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게 아닐까? 아빠가 매일 밤 허름한 차림의 중년남성이 홀로 산골에 사는 이야기인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서 서울 근교에 텃밭에 가는 건, 귀농 목적이 아닐 것이다. 고독과 궁핍함과 맞바꾼 그들의 '슈필라움'이 부러운 것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윤재영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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