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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줄의 사실도 그때는 소중했다”

기사승인 2020.08.26  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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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균 기자 유희태 PD 966mhz@hanmail.net

- [저널리즘 특강] 정연주 전 KBS 사장
주제 ① 내가 겪은 한국언론 50년

“1977년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지 3년이 지났을 때도 해직기자들은 기자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해 10월부터 1년 동안 국내 민주주의나 인권 관련 뉴스에서 언론에 일체 보도되지 않던 것만 모아 필사로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습니다. 그냥 일어난 사실만 모아서 적었을 뿐인데도 이거 만들었다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잡혀갔죠. 저를 포함한 10명이 13개월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단 한 줄이라도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하는 것조차 그때는 소중했습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내가 겪은 한국언론 50년’을 주제로 특강을 하면서 <동아일보> 해직기자 시절 경험을 화두로 끌어냈다. 그는 기자로 활동하던 옛 시절을 박정희정권과 싸운 시기로 기억했다. 정권의 눈을 피해 유인물을 만들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요즘 기자들이 사실 하나를 소중히 하는 자세를 잊은 것 같다고 우려했다.

   
▲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지난 6월 4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에서 독립운동가 함석헌과 교황 요한 23세의 발언을 인용하며 언론의 중요성을 대중을 이끄는 종교에 빗대 설명했다. ⓒ 김현균

“왜 기자 하러 왔냐”는 질문에 놀란 수습기자

정 전 사장은 <동아일보> 수습기자 시절 오리엔테이션에서 “왜 기자 하러 왔냐”는 선배기자의 질문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의 질문은 군사정권의 감시 아래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지금 무엇을 하려고 기자가 됐느냐는 뜻이었다.

<동아>에 입사한 정 전 사장은 언론인으로서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는 당시 “옛날 예수, 석가, 공자가 섰던 자리에 오늘날 신문이 서있다”고 말한 함석헌 선생의 말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기자 일을 신성하게 여기고 헌신하려던 그에게 선배의 질문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요즘 기자지망생이라면 먼저 들어간 동기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업계에 관한 정보공유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리 업계 상황을 알기가 힘들었다.

그는 기자생활을 시작한 뒤 경험한 언론의 암흑기에 벌어진 일들을 털어놓았다. 당시에는 박정희 정권의 의도에 거슬리는 보도는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유신체제에 반발한 대학생들의 시위, 열악한 노동환경을 비판한 노동자들의 시위는 기사로 내보낼 수 없었다. 어쩌다 대학생들 시위를 기사로 다뤄도 시위가 아닌 ‘학원사태’라고 말해야 했다. 당시 야당 대표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느 재야인사’로 보도했고,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로 표현해야 했다.

1971년 3월 26일, 정 전 사장은 내근을 하다가 사옥 앞에서 대학생들이 ‘언론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낭독하는 것을 지켜봤다. 학생들은 당시 짓고 있던 <조선일보> 사옥을 추잡한 껍데기로, <동아일보> 기자들은 민주투사가 아닌 잡귀들이라고 부르는 등 강한 말로 언론을 비판했다. 학교에서 제적되고 군대로 끌려가거나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인데도 학생들은 당당하게 시위를 벌이며 목소리를 냈다. 2년 뒤인 1973년, 모교인 서울대에서 열린 시위현장을 취재하러 갔을 때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고 적힌 팻말을 보기도 했다. 그는 기자로서 무력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화가 났다고 한다.

   
▲ 함석헌 선생 1주기 추도식 사진. 그는 자신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 창간호에서 ‘옛날 예수, 석가, 공자가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 있다’며 언론을 신성하고 막중한 책임을 진 존재로 규정했다. ⓒ KBS

해고도 막지 못한 기자의 사명감

정 전 사장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있던 5년을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로 표현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편집국장 옆 자리에 상주하며 신문제작 과정에 일일이 간섭했다. 정부 심기를 건드리면 어김없이 잡혀 가서 구타를 당했다. 그는 “기자들이 두드려 맞고 나면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면서 “자기검열을 하면 저널리스트의 생명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기자들이 그 역할을 전혀 못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다가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제작을 거부하고 파업도 하면서 회사를 설득했습니다. 조금씩 보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내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기업을 윽박지르는 방식으로 광고탄압이 들어온 거예요. 그때 국민으로부터 열화와 같은 지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택시를 타서 <동아일보> 가자고 하면 기사가 돈을 안 받았습니다. 국민들이 암흑시대에서 빛을 본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언론 자유의 영역을 하나씩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게 여길 법한 ‘외부간섭 일절 배제’, ‘기관원 출입금지’, ‘동료가 잡혀가면 퇴근하지 않고 저항’이라는 세 가지 조건과 행동지침을 내걸었다. 정 전 사장은 “당시에는 이것들이 가장 절박했기 때문에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면서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1년 만에 드디어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 광고를 하루아침에 모두 없애버리는 것으로 언론을 억압했다. 백지광고가 나오자 시민들은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성원과 함께 민주주의의 축제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압박을 강화했고 결국 굴복한 경영진은 1975년 3월 113명의 언론인을 해직했다.

해직 이후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현장의 기자로 활동했다. 1977년 10월부터 1년 동안 ‘알리미’라는 유인물을 필경으로 만들어 배포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뉴스들만 모아서 만든 일지였다. 여기에는 의견이나 정치적 해석은 없었고 사실만 들어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0명의 기자를 잡아갔다.

당시 정연주 전 사장을 포함한 10명의 기자들은 징역 13개월을 선고받았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내놓은 것뿐인데 기자 10명이 감옥으로 끌려간 것이다. 그는 “여러분이 언론 현장에 가면 확인된 팩트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가슴에 깊이 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1974년 <동아일보>에 독자들이 올린 백지광고의 일부. 많은 이들이 광고료를 내고 익명으로 격려 문구를 보내왔다. ⓒ KBS

교수보다 기자가 더 하고 싶었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에 갔다 온 정 전 사장에겐 여러가지 제약이 따라다녔다. 감시가 붙어 가족들 생활도 힘들어졌다. 안전을 위해 부모님을 미국으로 보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임종을 지키고 싶었지만 이전 전적 때문에 여권조차 발급받기 어려웠다. 유일하게 미국에 갈 방법은 유학길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휴스턴 대학에서 원래 원하지도 않은 것이었지만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게 됐다. 다시 기자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박사과정을 끝내고 <한겨레신문> 창간 소식을 접했을 때 그는 너무나 반가워했다. 교수 자리도 노릴 수 있었지만  다시 기자로서 펜을 잡았다. 그는 <한겨레>에서 특파원으로 11년, 논설위원으로 3년 일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기간으로 회상한다. 그는 새로운 신문, 희귀한 신문을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 하나로 형편없이 적은 월급 등 불리한 노동조건을 참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한겨레>가 창간 때 정신을 잊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초창기 <한겨레>는 잘못된 기자들의 관행을 혁파하는 데 앞장섰다. 기자실의 촌지 실태를 폭로해 그것을 없애 나가는 데 기여했고, 기자실 체제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출입처 기자실 간사가 되지 말자는 원칙까지 세웠다. 그는 지금 <한겨레>가 유력 일간지 중 하나로 기자실 체제에 적응했고, 기자실 간사까지 맡는 <한겨레> 기자도 생겼다며 안타까워했다.

   
▲ 정연주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이 북한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발 고려항공에 탑승하기 전에 기념 사진을 찍었다. ⓒ <한겨레>

“개혁은 선한 의지만으론 어렵다”

2003년 4월 한국방송(KBS) 사장에 임명돼 5년 4개월 동안 재임했다. 정 전 사장은 임기 동안 고쳐야할 몇 가지를 정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수직적인 조직문화 개선이었다. 세분화한 직급을 허물어 팀 내부에는 위계가 없도록 단순화했다. 의사결정 과정이 단순해지자 건전한 회의문화가 자리잡았다. 그러나 명함에 들어갈 직급이 없다는 이유로 내부 저항이 어마어마했다. 그가 떠나자 수직적인 조직문화로 금방 돌아가버렸다. 그는 “개혁은 선한 의지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고 지혜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사람을 뽑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전면 블라인드 채용제도를 도입했다. 인사부에 제출하는 서류를 빼고는 채용과정에서 출신학교 등을 알 수 없도록 했다. 5년 동안 6백여 명을 뽑으면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기존 제도에서 입사한 기자와 PD의 출신 대학이 20개 안팎이었는데 이후 86개로 늘어났다. 그는 KBS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인사제도를 개선한 것을 가장 보람있는 일로 꼽았다. 그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공정한 채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당한 사장 해임으로 좌초한 KBS 개혁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정연주 사장은 정권의 눈 밖에 났다.  정  사장은 감사원의 해임 요구에 따라 2008년 해임됐다. 해임된 이유는 인사전횡과 부실경영 두 가지였다. 당시 감사원은 팀제 등 인사와 관련한 정 사장의 개혁 조처에 ‘인사전횡’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2005년 KBS가 국세청을 상대로 한 법인세 부과 소송에서 정 사장이 법원의 조정 권고를 받아들인 것도 KBS의 재정에 악영향을 끼친 배임행위라고 매도했다.

그는 2012년이 돼서야 부당한 해고조처에 항의하는 행정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당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2011년 3월 17일 “정 전사장에게 무죄판결이 나면  적절한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죄판결이 났음에도 최 전 위원장은 정 전 사장에게 사과의 말만 전했을 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 정연주 사장 해임 제청안이 가결된 2008년 8월 8일 KBS 앞에서 300여명 사원들이 해임 반대 집회를 열고 "해임안을 철회하라" "방송탄압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 SBS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1학기 [저널리즘 특강]은 김언경, 김양순, 곽윤섭, 정연주, 강진구, 고경태, 민경중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임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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